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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금인형 Jan 18. 2022

"왜요?"라고 물어야 답이 보인다

[완독 일기 / 천년의 수업]

천년의 수업 / 다산초당

「천년의 수업」에서 파생된 3가지 질문     

그림책 「왜요?」(린제이 캠프 글·토니 로스 그림)에는 온종일 “왜요?”라고 묻는 아이 릴리가 등장한다. 왜 옷을 입는지, 왜 달걀이 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왜 비가 오는지, 왜 젖은 곳에 앉으면 안 되는지, 먹구름 속에는 왜 물방울이 가득 들어 있는지 묻고 또 묻는다. 육아의 신이 와도 짜증 없이 받아주기 힘든 릴리의 한 마디 “왜요?”. 하지만 외계인들이 지구를 침략했을 때 릴리의 “왜요?”는 진가를 발휘하고 지구를 지키는 역할을 한다.

책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아이를 키우며 경험한 바에 따르면 무차별 질문 폭격에 끝까지 침착하게 응대하는 건 쉽지 않다. 어느 순간 "그냥! 그냥 그런 거야'라고 버럭 소리를 지른다. 그러면 아이는 또 묻는다 '그냥이 뭔데?'


「천년의 수업」 표지에 적힌 부제 '나와 세상의 경계를 허무는 9가지 질문'을 읽은 순간 ‘책을 읽어야 할까?’ 고민이 시작됐다. 첫 질문 ‘나는 누구인가?’부터 마지막 질문 ‘잘 적응하려면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가?’까지 목차를 읽은 후에는 더 책장을 덮고 싶었다. 경계를 허물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었다. 내가 쳐놓은 울타리 안에서 안온하게(어쩌면 태평하게) 살고 싶은 마음. 그 울타리 이름은 회피였다.     

50년 가까운 삶에서 더는 ‘내가 누구인지’ ‘인간답게 잘 사는 게 무엇인지’ ‘타인을 이해해야 하는지’ 등을 묻고 싶지 않았다. ‘이 정도면 됐어’ 하는 생각도 있었다. 반면, 아이는 경계 자체가 없다. 자신과 세상 사이에 울타리를 치지도 않는다. 그저 궁금하면 묻고, 이상하면 따지면서 이 세상을 제 것으로 만든다.     

이제 나는 「천년의 수업」을 끝까지 읽었다. 저자가 말했듯 대답은 틀릴 수 있다. 하지만 질문은 틀리지 않으니 이제 나에게 묻는다.     


첫 번째 질문, 질문의 방향은 어디인가?     

요즘 우리 부부의 주된 대화 주제는 '집'이다. 전세 계약 만료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폭등한 전셋값 때문에 고민이다. 외곽으로 이사를 가자니 아이 전학 문제가 걸리고, 대출을 받아서 같은 학군 내 아파트로 가자니 대출 이자가 무섭다. 하루는 내가 남편에게 ‘집 어떻게 할까?’ 묻고 다음날은 남편이 내게 ‘그래서 집 어떻게 할까?’ 묻는다. 대화는 답도 없이 돌림노래처럼 빙글빙글 돈다. 대출 이자를 내든 아이 학교를 포기하든 해야 하는데 둘 다 손에 꼭 쥐고 놓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처럼 신탁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좋겠는데 사실 그럴 자격이 되는지도 의문이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돈이 있으면 다 해결될 텐데'라는 생각이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천년의 수업」에서 저자가 던진 세 번째 질문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토록 치열하게 사는가’는 이런 나에게 질문의 방향을 바꾸도록 도와주었다. 오뒷세우스는 전쟁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던 중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오귀기아 섬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오뒷세우스는 아름다운 님프 칼륍소가 제공하는 온갖 유희와 쾌락을 즐기지만, 몇 년 후 풍요와 환락을 뒤로하고 다시 고향으로 향한다.     

‘오귀기아섬에 남았다면 영원토록 즐겁고 편하게 살 수 있을 텐데, 오뒷세우스는 왜 굳이 그곳을 떠난 걸까요? (중략) 그의 귀가는 인간 조건 속으로의 회귀를 의미합니다. 죽음이 있는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그것이 영원한 삶보다 더 가치 있다고 이야기하듯이 말입니다.’(128, 129p)

그러니까 답안지부터 잘못 만들어졌다. ① 대출 이자 ② 학군, 이렇게 2지선다형 답안지로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삶은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답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데다 무엇에 더 높은 가치를 매길 것인지는 개인이 처한 상황과 지나온 역사에 따라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질문해보자. 집을 구할 때 무엇을 고려할 것인가. 아이는 무엇을 원하는가. 의식주 외에 우리 가족에게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 좋은 이웃은 어디에서 만날 수 있는가…     

경주마처럼 한 방향만 바라보지 말고 질문의 방향을 돌려볼 것, 질문의 품격을 높일 것. 「천년의 수업」이 나에게 준 숙제다. 물론 대출 이자와 학군을 답안지에서 빼지는 않을 것이다. 더 많은 질문과 대답 중에서 고르고 골라 결정할 것이다. 10년 후 내 대답이 틀렸구나 후회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오뒷세우스도 평탄한 앞날을 예상하고 칼륍소를 떠난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두 번째 질문, 무엇을 읽을 것인가?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떠오릅니다. 이 사람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중략)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하고, 그로 인해 얼마나 고통을 받았으며 어떤 최후를 맞이하는지 보면서 인간과 인생에 대해 묻게 되는 거예요. 책은 많은 사람과 상황과 사건, 사회와 시대를 경험하게 해 주면서, 나를 만들어 가고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요’(299p)     

저자는 「천년의 수업」에서 독서의 쓸모와 고전의 역할에 대해 강조한다. 이 문장은 재미와 간접 경험을 독서의 주된 이유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잘하고 있군’이라고 칭찬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런데 가만 보자. 한국인의 평균 독서량에 비해 상당히 많이 읽는 나는 왜 「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를 읽지 않았을까? 「천년의 수업」에서 만난 이들의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는데 왜?

이유는 호메로스의 책들은 나 같은 범인(凡人)이 읽는 책이 아니라고 선을 그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과 영웅 이야기를 줄줄 꿰고 있거나 서양철학사의 흐름을 단번에 떠올릴 수 있는 정도의 지식인들을 위한 책이라고 여겼다. 내가 틀렸다. 「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는 그저 오래된(古) 책이 아니라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것을 미처 몰랐다. 심지어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내가 욕망하는 것들은 정말 내 절실한 결핍에서 비롯된 욕망인 걸까?'(48p) '나와 이 세대의 우리는 앞으로 이 땅 위에 무엇을 새겨 넣어야 하는가?'(103p) '내가 죽고 나면 지금 하는 일이 무슨 소용일까?'(108p) 등의 질문에 답을 찾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고전에 재미를 더해 통찰에 이르게 하는 것, 내가 느낀 「천년의 수업」의 가장 큰 미덕이다. 이제 무엇을 읽을 것인가? '사람다움을 묻는 인문학의 쓸모'(101p)가 무엇인지 찾아가는 책 리스트를 만들어야 할 때다.     


세 번째 질문, 어디로 갈 것인가?     

아이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여행 적금을 들었다. 적금 만기를 3년 앞둔 요즘 아이와 나는 종종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여러 나라를 둘러보고, 맛있는 것 많이 먹고, 많이 보고 즐기고 오자고 아이와 약속도 했다. 「천년의 수업」 마지막 장을 덮은 순간 세계여행의 출발지가 결정됐다. 그리스 델피. 세상의 중심에 놓인 돌(옴파로스) 앞에서 나의 세계는 얼마나 확장됐는지 나 자신에게 물어볼 것이다. 혹시 아이가 자신을 둘러싸는 울타리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도 살펴봐야겠다. 어린 시절 아이의 질문에 '그냥! 그냥 그런 거라고' 답해서 미안했다는 사과와 함께.     


#천년의수업 #김현 #다산초당 #완독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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