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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금인형 Jan 18. 2022

친애하는 요즘 젊은것들에게

[완독 일기 / 일의 기쁨과 슬픔]

일의 기쁨과 슬픔 / 창비

장르문학과 순수문학의 차이를 (굳이) 구별하자면 장르문학은 사건의 한가운데 있는 이야기인 반면, 순수문학은 사건이 지나간 후의 이야기 정도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일의 기쁨과 슬픔」은 나에게는 순수문학에 가깝다. 그럼 20, 30대 청년들에게는 장르문학일까? 취업전선을 거치고 직장 내 동부, 서부를 오가며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으니 아마도 스릴러에 가까운 장르가 아닐까 싶다.     

나는 나이로만 본다면 밥벌이 전선의 한가운데를 지나온 사람이다. 이 책은 20, 30대 직장인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룬다. 그래서 나에게 이 소설 읽기의 화두는 ‘시간’이다. 청년들에게 현재인 이 이야기가 나에게는 과거이고, 아직 학생인 내 딸에게는 미래가 될 것이다. 독서를 시작하기 전에 나 자신에게 당부한 것은 (‘라떼는 말이야’를 시전 하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어디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볼까?’라며 팔짱 낀 꼰대 관객 모드를 해제하는 것이었다.        

  

내 얘긴 줄!     

최근 수년간 책을 읽으며 이렇게 자주 과거를 회상한 적이 있었나 싶다. 시대를 통과한 사람의 위치에서 책을 읽다 보니 그랬다.     

<잘 살겠습니다>에서 스물일곱 살 빛나는 원룸 이중계약 사기를 당한다. 확정일자가 뭔지도 모른다. 화자인 '나'는 기본적인 부동산 상식도 없는 빛나 언니를 보며 크게 놀란다. 자, 이제 나의 과거! 나는 스물일곱 살에 어땠나? 유구무언이다.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월급을 현금 대신 회사 포인트로 받는 '거북이알'은 화자인 '나'에게 "회사에서 울어본 적 있어요?" 묻는다. 장담컨대 이 문장을 읽은 독자들 열에 아홉은 거북이알이 자신에게 묻는 말인 양 '나는 회사에서 울어본 적 있나?' 떠올렸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울어본 적? 몇 번 있다. 왜 울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감동을 받아서 운 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백한번째 이력서와 첫번째 출근길>의 주인공은 각종 공과금과 적금, 월세 등을 제외하고 하루에 (교통비 포함)만천원을 쓸 수 있는 형편이다. 무더운 여름, 첫 출근 날 온몸이 땀으로 젖은 채 버스를 기다리던 주인공은 테이크아웃 커피 2천 원이라는 광고판을 보고 잠시 망설인다. 아마 만천 원에서 2천 원을 제하면 하루 씀씀이가 어떻게 달라질지 고민했을 것이다. 땀으로 샤워를 한 채 첫 출근을 할 수는 없으니 카페 에어컨 바람으로 땀에 절은 블라우스라도 식힐 겸 2천 원을 소비하기로 마음먹는데, 이럴 수가! 핫아메리카노만 2천 원, 아이스아메리카노는 4천5백 원. 다시 고민이 시작된 주인공의 결정은? 결론만 얘기하면 주인공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손에 들고, 새로 산 구두 굽 소리를 경쾌하게 울리며, 차원이 다른 냉방시설을 갖춘 회사 건물로 들어선다. "오늘은 좀 망했지만, 내일부터는 오늘 몫까지 정말 아끼고 또 아껴서 십만 원짜리 적금을 하나 더 부어야지" 다짐하며. 


이제 다시 나의 과거! 무더운 여름, 외근하는 날, 점심시간. 시원한 냉면이 먹고 싶었던 나는 잠시 고민한 후 (고민의 이유는 작품 속 주인공의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 슈퍼마켓에서 시원한 쭈쭈바를 사 먹었다. 이름도 기억난다. 탱O보이. 그러다 쭈쭈바가 얼마나 탱크처럼 단단하던지 앞니가 부러졌다. 이후 몇 주간 수십만 원의 치료비를 내며 치과에 다녔다. 당시 나의 하루 식비 예산은 3천 원이었다.


운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으니까     

반성하자면 가끔은 나도 그랬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요즘 젊은것들’ 어쩌고 저쩌고 했다. 끈기가 없고, 이기적이고……. 그렇다고 내가 직장 생활을 하던 20, 30대에는 끈기가 있고, 남을 배려하고 그랬는가 하면 딱히 그러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나이 조금 더 들었다는 이유로 청년들을 한데 묶어 그렇게 얘기했다. 그러니까 이 독후감은 반성문이자 시대의 흐름을 읽을 수 있게 혜안을 준 데 대한 감사의 인사이기도 하다. 책을 읽은 후 생각한 키워드는 두 가지였다. ‘실리와 도리 사이’ 그리고 ‘다소 낮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움의 손길>에 나오는 그랜드피아노 비유는 실리를 대표하는 상징이다. 주인공 부부에게 아이는 그랜드피아노와 같다. ‘평생 들어본 적 없는 고귀한 소리’를 내는 가치 있는 피아노이지만 집안에 들이기 전에 그것을 놓을 각이 나오는지를 먼저 판단해야 하는 것. 이것이 이들에게는 실리다. 한편 2주일에 한 번씩 집안일을 하러 오는 가사도우미가 아들 계좌로 돈을 받는 것을 보고 속이 상한 주인공은 ‘다음에는 잊지 않고 미리 현금을 찾아놔야겠다’고 생각한다. 가사도우미를 고용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도리였다. 그러나 가사도우미가 생각하는 도리와 실리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일하는 시간이 점심시간과 겹쳤을 때 간단하게라도 먹을거리를 준비해주는 것이 고용인의 도리고, 자신의 일정에 맞춰 일할 집을 고르는 것이 자신의 실리다. 어떻게 보면 도리와 실리를 따지는 건 나이보다는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고 보는 게 맞겠다. 다만 누가 더 합리적인 선택을 했는가 따져볼 수는 있을 것이다. 물론 결과론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다소 낮음>의 등장인물 역시 도리와 실리를 넘나들며 삶의 고민 한가운데 있다. 장우는 홍대에서 인디음악을 하는 뮤지션이다. 심심풀이로 만든 ‘냉장고송’이 sns에서 인기를 끌면서 기획사의 러브콜을 받는다. 문제는 장우가 하고 싶은 음악과는 방향이 다르다는 것. 두 달째 연체된 전기요금을 생각하면 눈 딱 감고 기획사의 제안대로 하면 될 것을 장우에게 그것은 자신의 음악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하지만 장우가 키우는 강아지가 병에 걸리고 치료비가 필요해지면서 장우의 도리는 그 방향을 바꾼다. 개를 살리는 것이 먼저다. 자신이 거절했던 기획사를 찾아가는 굴욕을 감수하면서 지키려 했던 장우의 도리는 결실을 맺지 못한다. 강아지는 무지개 다리를 건너고, 여전히 장우의 집 전기요금은 연체된 상태다. 장우에게 ‘실리를 추구했어야지’라며 한마디 거드는 건 의미 없는 일이다. 장우는 실리와 도리 사이에서 우왕좌왕하지만 결국은 그래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으로 스스로를 대접받게 했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다소 낮은' 곳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높은 곳만을 바라보지 않는다. 자기의 자리에서 각자의 일을 한다.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지만 그것에 모든 것을 걸진 않는다. 현재에서 옆을 보며 즐거움을 추구하기도 하고 포기할 건 포기하고,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찾는다. 단편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거북이알은 월급으로 받은 포인트를 보고 잠시 울지만 곧 포인트를 현금화할 대책을 마련한다. 현실이 먼저니까. 박준 시인의 시집 제목을 빌어 말하자면 '운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으니까'. 하기 싫은데 하는 것과 하고 싶은데 못 하는 것 사이에서 나름 현실 감각을 잃지 않고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아이티 기업의 이미지와 자꾸 어긋나는 장면(예를 들어 영어 이름 뒤에 님자를 붙인다거나, 데일리 스크럼을 45분씩 서서 한다거나)들은 20, 30대 그들도 마냥 앗쌀하지는 않다는 걸 말하는듯해서 오히려 친숙했다. 21세기 IT 기업에서 '상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도 마찬가지. 인류애가 느껴진다고 할까.          


마지노선에 이른 그대들에게 ‘Dear’     

<도움의 손길>에 나온 긴 숟가락 지옥 이야기는 이전에도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긴 숟가락으로 서로에게 밥을 먹여주어야 모두 살아남을 수 있는 곳. 서로 힘을 합치는 것이 당연해 보이는 곳. 그런데 나는 상대에게 밥을 먹여주었는데 그 상대가 먹튀를 한다면? 나는 a에게 밥을 먹여주었는데 a는 내가 아닌 b에게 밥을 준다면? 내가 밥을 먹여주어야 할 상대가 평생 나를 괴롭힌 사람이라면? 황당한 의심인가? 황당한 일들은 현실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니 평소 이런 식으로 자문자답을 하면서 정신력을 강화해 놓는 게 낫지 않을까? 이 책의 등장인물들, 다시 말해 이 시대 청년들이 이런 정신력을 갖기를 바란다. 희망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가짜 희망이었던 일들을 너무 많이 겪는 ‘요즘 젊은것들’에게 미안해서 하는 말이다.     

이 책의 마지막 단편 <탐페레 공항>은 나의 이 미안한 마음을 더 미안하게 만든 작품이다. 특히 이 책의 대미를 장식한 마지막 단어 Dear는 근래 내가 읽고 쓰고 뱉어낸 말 중 가장 아름다운 단어였다. 동부전선, 서부전선을 거쳐 마지노선에 다다른 사람들에게 선포된 휴전 선언 같은 느낌이랄까. 작가는 ‘Dear’ 한 단어로 동시대를 사는 청년들에게 커다란 위로를 선물했다. 그 청년이 꿈만 꾸고 있는 사람이든, 철저히 현실을 사는 사람이든, 꿈과 현실 사이를 헤매는 사람이든 그들 모두는 안부를 들을 자격이 있다는 듯이. 그래야 마땅하다는 듯이.


#일의기쁨과슬픔 #장류진 #창비 #완독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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