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독 일기 / 내가 말하고 있잖아]
읽는 것을 좋아한다.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책 제목을 빌리자면 ‘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읽는다. 집 안 여기저기 책을 두고 읽는다, 가방 속에 책을 넣지 않은 채로 외출하면 불안도가 급증한다. 읽을 짬이 나지 않을 게 뻔한 외출이라도 가방 속에는 책이 있어야 한다. 혹시 내가 만나기로 한 사람이 5분 늦을 수도 있고, 차가 고장 나서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할 수도 있고. 어떤 상황이 될지 모르니 그때를 대비해 책은 필요하다.
가끔은 쓰기도 한다. 읽는 일에 순위가 밀려서 빈도가 적기는 하지만 그래도 쓰기는 한다. 주로 읽은 책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 글이다.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그토록 좋아하는 ‘읽기’만 하고 살면 될 것을 뭘 좀 써보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책은 재미있게 읽었는데 글로 정리가 안 되는 것이 문제다. 기억해 두고 싶은 문장을 옮겨 타이핑할 때만 신난다. 이어서 내 글을 쓰기 시작하는 순간 텅 비는 뇌. 쓰다 말다를 반복하며 리뷰 쓰기를 포기한 책이 허다하다. 그리고 기록하지 못한 것에 대해 속상해한다.
누가 청탁을 한 것도 아니고, 등을 떠미는 것도 아니고, 학교 숙제도 아닌데 안 쓰면 되는 것 아닌가. 아니다. 나의 기억력은 한 달 전에 읽은 소설의 주인공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결말이 가물가물할 때도 있다. 책의 이미지만 남고 내용은 휘발되는 놀라운 경험, 나만 겪었을까?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 아니었으면 좋겠다. 남는 것은 책을 읽을 때의 온도와 습도와 조명과….
읽은 책 내용을 꼭 기억해야 한다고 묻는다면, 대답은 ‘그렇다’이다. 왜? 읽은 책에 대해 나누는 대화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잘난 척하기에 읽은 책 이야기만 한 것이 또 있는가 말이다. 에잇! 어쨌든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머리에 가득 찬 생각을 문장으로 만드는 능력의 부재. 이 능력을 키우기 위해 세간에 회자되는 방법들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필사를 하고, 미라클 모닝을 활용해서라도 꾸준히 쓰고, 메모를 하고 기타 등등. 아는데 잘 안 된다. 정용준 작가의 소설 「내가 말하고 있잖아」의 주인공 소년처럼.
단숨에 읽었다. 그 몇 배의 시간 동안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자기 전에, 아이 학교 숙제를 챙기면서, 식사 준비를 하면서, 운동을 하면서 그들을 생각했다. 「내가 말하고 있잖아」는 말더듬증으로 언어 교정원에 다니는 14살 소년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다. ‘처방전’이라는 단어를 발음하지 못하는 외과의사, 말을 할 줄 아는데 하지 않는 남학생, 아나운서처럼 멋진 발음과 발성을 갖고 있지만 특정한 상황이 되면 정신을 놓는 여학생, 모티프라는 단어를 강박적으로 자주 사용하는 중년 남자, 치매에 걸린 할머니 등.
내가 머릿속에 가득한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면 이들은 말로 발화화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소통할 내용은 있지만 도구가 말을 듣지 않는 상황. 고장 난 도구를 고치기 위해서는 솔루션이 필요하다. 큰 소리로 자기소개를 한다. 발음이 안 되는 단어가 있다면 대체할 단어를 떠올려서 다시 말해본다. 낯선 사람에게 길을 물어본다. 장터에서 파인애플을 팔아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솔루션은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생각들을 쓰는 것이다. 주인공 소년은 마음속에 쌓인 감정들을 쓰기 시작한다. 자신을 정서적으로 방임한 엄마에 대한 애증을, 엄마의 쓰레기 같은 애인에 대한 증오를, 수업 시간마다 일어나서 읽기를 강요해 반 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되게 하는 국어 선생에 대한 복수의 마음까지.
「내가 말하고 있잖아」는 소년이 언어 교정원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위로를 받고, 조금씩 성장하는 이야기다. 통쾌함이 느껴지는 에피소드도 있다. 유창하지는 않지만 발음하지 못했던 말들이 소년의 입에서 소리가 되어 나올 때는 ‘어이구 내 새끼’ 하며 등을 토닥여주고 싶기도 하다.
이 책은 한 소년의 성장소설일 수도 있고,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위한 힐링 소설일 수도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발화되지 못하는 모든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누구나 이야기 전달자가 될 수 있다. 소년을 포함해 언어 교정원에 오는 사람들은 이야기를 세상에 꺼내놓기 위해 애쓴다. 방식은 더듬더듬 서툴지만 그 안에 쌓인 이야기의 풍성함과 깊이는 유창하게 말을 하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소년은 글을 썼다. 그의 마음속 이야기는 소리가 되어 세상으로 나오지는 못하지만 종이 위에 빽빽한 글씨가 되어 나왔다. 그 글씨들은 언젠가는 필요한 곳에 안착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소년의 말더듬증을 치료하는 데 가장 중요한 심리적인 장애물을 걷어내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야기를 내보내는 것. 말로, 글로, 몸짓으로… 전달 방식은 달라도 누구든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용기를 내서 세상에 내보내길. 그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장애물을 걷어내는 도구가 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깨닫는다.
머릿속에 가득한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능력이 부재하더라도 이렇게나마 기록해두면 「내가 말하고 있잖아」의 주인공이 누구였는지 정도는 기억하겠지.
그러니까 ‘내가 쓰고 있잖아’
기억하고 기록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