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초등학교 3학년인 딸아이가 드라마를 보는 방식이 특이하다. 16부작 드라마를 유튜브 20-30분 요약본으로 본다. 처음엔 이해가 안 됐다.
"왜 원본을 안 보고 요약본만 봐?"
"아빠, 이게 더 재밌어. 내용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어."
난 순간 깨달았다. 우리 아이들은 이미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최근 연구원 업무에서 PINN(Physics-Informed Neural Networks) 모델을 구현하고 있다. Claude에게 요구사항을 설명하니 몇 분 만에 완벽한 코드가 나왔다. 예전 같으면 몇 주 걸렸을 일을 하루 만에 끝냈다.
대학원 시절 생각이 난다. 그때는 정말 날코딩이었다. 알고리즘 책 뒤져가며, 구글 검색하며, 밤새 디버깅하며 한 줄 한 줄 직접 짰다. 논문 영어 작문도 마찬가지였다. 문법 검사기 돌리고, 원어민 교정받고...
지금은 AI가 어색한 한국식 영어를 자연스러운 학술 문체로 바꿔주고, 문법까지 완벽하게 잡아준다. 정말 압도적으로 편해졌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내가 만든 코드를 나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는 교수님께 들은 이야기다. 요즘 대학생, 대학원생들을 보면 AI 활용 능력이 정말 원어민급이라고 한다. ChatGPT로 논문 초안을 작성하고, GitHub Copilot으로 코딩하고 Claude로 데이터 분석까지 한다. 결과물의 퀄리티는 과거 어떤 세대보다 뛰어나다.
그런데 질문을 하면 답을 못한다고 한다.
"이 알고리즘의 원리가 뭐야?"
"이 통계 방법을 왜 선택했어?"
"이 코드에서 이 부분이 하는 역할이 뭐야?"
결과는 구현하는데 원리를 모르는 것이다.
처음엔 이것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기본기 없이 어떻게 깊이 있는 연구를 할 수 있을까? 리뷰어 질문에는 어떻게 답할 것인가?
하지만 생각해보니 이건 **연구자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대부분의 직업군에서는 AI 활용 능력 자체가 더 중요한 스킬이다. 마케터가 ChatGPT로 매력적인 카피를 쓰고, 기획자가 Claude로 완성도 높은 보고서를 만드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짜 경쟁력 아닐까?
엔지니어도 마찬가지다. 모든 알고리즘을 밑바닥부터 구현할 필요 없이, 적절한 도구를 선택해서 빠르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심지어 창의적인 영역도 그렇다. AI가 그려준 그림에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더해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아티스트, AI가 작곡한 멜로디를 편곡해서 완성도 높은 음악을 만드는 뮤지션. 이들의 능력을 폄하할 수 있을까?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책을 읽으며 우려했던 것들이 현실이 되고 있다. 알고리즘에 길들여진 우리의 뇌는 짧고 강렬한 자극에만 반응한다. 긴 호흡의 사고나 깊은 몰입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딸아이가 드라마 요약본만 보는 것도, 학생들이 AI 결과물의 원리를 모르는 것도 모두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개인의 나태함 때문일까? 아니면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능력일까?
결국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연구자의 길"을 걸을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깊이가 필요하다. 원리를 이해하고,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는 능력. 이것 없이는 진정한 혁신은 불가능하다.
"실무자의 길"을 걸을 사람들에게는 AI 활용 능력이 더 중요할 수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적절한 도구를 선택해서 효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문제는 우리 교육 시스템이 아직도 모든 학생을 연구자로 키우려 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수학의 원리를 깊이 이해해야 할까? 모든 사람이 프로그래밍 알고리즘을 밑바닥부터 구현할 수 있어야 할까?
AI 시대의 교육은 **"무엇을 위한 학습인가?"**에 대한 명확한 답을 가져야 한다.
깊이 있는 사고력이 필요한 영역과 효율적인 활용 능력이 중요한 영역을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각자의 길에 맞는 다른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
딸아이에게 더 이상 "드라마 전편을 다 봐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 시간에 더 의미 있는 다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한다.
AI와 함께 살아가는 이 시대에, 우리가 진짜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 답은 각자가 걸어갈 길에 따라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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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을 다니며 박사 학위를 취득한 연구원이, 변화하는 시대의 학습과 연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