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지도교수님을 찾아뵈었다.
교수님은 인자한 웃음을 지으시며 날 반갑게 맞아 주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교수님은 문득 교육자로서의 철학과 양심에 대해 말씀하셨다.
아마 예전에 내가 "교수님 수업은 너무 어렵다. 학생들 불평을 이해한다."고 뒤에서 했던 이야기가 교수님 귀에 들어간 모양이다.
요즘 대학교는 4학년에 취업을 하면 수강 중인 과목에 출석하지 않아도 출석을 인정해준다고 한다. 공대에서는 4학년 1학기에 취업을 하는 친구들이 많은데, 이들은 합격한 회사에 출근하며 학기를 보내다 졸업장만 받으면 정식으로 입사하는 시스템인가 보다.
하루는 교수님 수업을 듣는 한 학생이 취업을 했다고 수업에 참석을 못한다고 메일을 보냈다. 교수님께서는 출석은 인정해주지만 규정 상 시험과 평가는 정상적으로 진행된다고 회신을 해주셨다.
그렇게 그 학생은 공결로 출석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중간, 기말고사 기간에는 출석하여 시험을 쳤다.
수업을 듣지 않은 학생이 시험을 제대로 칠 수 있을 리 없었다. 학생은 시험 답안지를 거의 백지로 냈다.
학기가 끝나고 그 학생은 교수님 수업에서 성적 'F'를 받았다.
취업을 하였지만 학점을 이수하지 못해 졸업을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취업을 했지만 졸업을 못하게 되자 학생과 학생 집에서는 비상이 걸렸던 모양이다. 결국 학생 부모님께서 학교를 찾아오셨고 교수님과 면담을 요청하셨다고 한다.
교수님 연구실에 학부생 학부모님이 찾아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교수님은 조금 당황하셨고 죄송한 마음이 드셨다고 한다.
하지만 교육자로서 철학이 있었던 교수님, 면담에서 학생 시험 답안지를 학부모님께 보여주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어머님, OOO 학생이 제출한 시험 답안지입니다. 한번 보십시오. 몇몇 학생은 OOO 학생처럼 백지를 제출한 학생도 있습니다. 그 학생들도 다 'F' 줬습니다. 나머지 학생들은 4학년이지만 최선을 다해서 과목 수강하고 공부해서 시험을 쳤습니다. 취업으로 인해서 출석은 인정해준다고 해도 시험 답안지를 백지로 낸 OOO 학생에게 다른 성적을 준다는 게 OOO 학생 인생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건 교육자로서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교수님은 "시험에서 백지를 낸 학생에게 성적 'F'를 준 게 뭐가 잘못되었는가?"라고 하셨다.
학생 시험 답안지를 본 학부모님은 잠시 침묵하셨다.
그리고 죄송하다 인사를 하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며칠 후, 교수님께 학부모님으로부터 장문의 메시지가 왔다. 아들 교육을 잘못 시켜서 죄송하다고, 답안지를 보고 할 말이 없었다고 하셨단다.
아마 학생이 부모님께 본인 억울함만 토로하고 시험을 어떻게 쳤는지는 말씀드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교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이 뜨끔했다.
정작 나도 대학생 때는 학생으로서 내 입장만 생각하고 많은 교수님들께 불만 섞인 민원 메일을 보냈었다. 교수님이 날 기억하지 못하실 거라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했었다.
그중 4학년 때 일이다.
당시 나는 취업을 하여 해당 과목에서 시험 대신 레포트를 제출했다. 이미 취업한 나는 대충 했었고, 담당 교수님은 'F'는 아니었지만 낮은 성적을 주셨다.
막상 학점이 나오자 나는 내 평점이 낮아지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해당 교수님께 컴플레인 메일을 보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뭘 잘했다고 그런 메일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교수님은 내 무례한 메일에 화가 나셨던지 답장에서 그 화가 느껴졌고, 성적은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10년도 훨씬 지나고 우연히 학회장에서 당시 교수님을 뵈었다. 나는 혹시라도 교수님이 그때 그 무례한 메일을 보냈던 학생으로 날 기억하실까 봐 조마조마했었다.
지도교수님은 교육자로서 학생들에게 지식만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신다.
그들에게 인성을 지도하는 역할도 교수로서의 역할이라고 하신다. 비록 인성교육이라는 과목을 만들어 수업은 안 하시지만 전공 수업 시간에 성실함과 예의 등을 간접적으로 지도하시는 거다.
지도교수님께서 내게 그런 경험담과 교육철학을 말씀하시는데 백 번 맞는 말씀이라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날 지도교수님과 미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문득 생각이 들었다.
학생 때는 이미 취업도 했고 4학년 마지막 학기에 수업이 뭐가 그리 중요하나 싶었다. 교수님께서도 학생들 취업과 미래를 위해 교육을 하시니 학생이 취업을 했으면 교수님과 난 서로 윈윈한 게 아닌가 생각했다.
마치 그 순간이 내 학교 생활이 마지막이고 새롭게 리셋되어 사회 생활을 시작한다 생각했다.
하지만 사회에 나와서 생활해 보니 세상일이란 게 결국 어제, 1년 전, 10년 전 있었던 일들에 의해서 지금의 나를 만들고 있단 걸 알게 되었다.
그때는 그 순간이 매우 억울했다. '이까짓 걸 가지고 왜 이렇게 빡빡하게 구시나' 생각도 했었다.
지나고 나니 그게 맞았다.
학교라는 울타리 밖을 나오니 평소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행동했던 것들이 세상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세상은 매우 냉정했다.
공들여 쌓은 프로젝트나 업무도 한순간의 이기적 행동으로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경험을 많이 했다.
이러한 경험을 20년 가까이 하고 나니 지금은 학생 때 내가 했던 행동들이 얼마나 철없었는지 알게 된다.
그런 시행착오를 사회에 나오기 전 학교에서 진지하게 미리 배웠다면 어땠을까?
아마 교수님들은 그걸 가르치고 싶으셨던 것 같다.
수업 시간의 원칙과 엄격함을 통해서.
백지 답안지에 'F'를 주신 교수님도, 레포트를 대충 쓴 나에게 낮은 학점을 주신 교수님도.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신 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