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졸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3번째 논문이 아직 리젝 상태였고, 나는 그 논문을 지금까지 투고한 적 없던, 임팩트팩터가 세 배나 높은 저널에 던져놓은 상태였다.
졸업 요건은 최소 3편. 나는 아직 2편만 출판했다. 교수님께서는 졸업 전 3~5편을 쓰라고 하셨다. 그래서 다급한 마음에, 일종의 시간 벌기로 높은 곳에 투고했다. 솔직히 말하면 교수님께 보여주기 식이기도 했다.
학위수여식을 위해 여러 가지 준비를 했다. 학위복도 빌리고 행정 절차를 진행했다. 혹시 행정 절차에서 실수를 해 졸업을 못 하면 어쩌나 하고 수시로 학과 사무실을 들락거리며 묻고 또 물었다.
"이제 졸업하면 가능한 거죠?"
"네. 이제 그만 좀 물어보시고 졸업하세요."
학과 사무실 직원분도 내가 부담스러운가 보다. 어린 학생이면 따끔히 한마디 하면 되겠지만, 자신보다 나이가 많을 것 같은 직장인 학생이 와서 귀찮게 하니 오죽 갑갑하셨을까.
그렇게 모두가 추운 겨울, 난 마음만은 충만하고 따뜻했다. 더 이상 학교를 안 다녀도 된다고 생각하니 시원섭섭했다.
"아이고. 당신은 나한테 고마워해. 나하고 당신 딸이 당신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내가 그랬나?"
"그래. 어디 갔다가 욕 좀 먹고 들어오면 풀이 죽어 가 땅이 꺼져라 한숨 쉬고... 매일 썩은 표정으로 우리가 얼마나 눈치 봤는지 아냐고..."
와이프는 그동안 나 때문에 힘들었다고 나를 놀리며 말했다. 나름 최선을 다해서 활기차게 생활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이라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생활 패턴에 가족 모두 고생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다행인 건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어서 이렇게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거다.
투고한 지 4주가 지났다.
'역시 높은 저널이라 쉽지 않겠지. 시간 벌려고 지른다고 질렀는데 졸업 전에 결과가 안 나왔으면 좋겠다.'
당시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Editorial Manager(논문 투고 시스템)에 결과가 나왔으려나 오매불망 들락거렸다. 4주가 지나니 조금 지치기도 했다. 난 여전히 직장을 오가며 학교를 오가며 바쁜 날을 보내고 있었고, 역시 너무 높은 저널에 투고했다고 혼자서 걱정하고 있었다.
바쁜 하루를 보내고 누웠다.
늦은 저녁, 무심코 휴대폰으로 Editorial Manager에 들어가 봤다. 그런데 그때 생각도 못 했는데 투고 결과가 나와 있었다.
'헉!! 올게 왔구나...'
손이 떨렸다.
'리젝이면 어쩌지? 지도교수님께 뭐라고 해야 하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결과를 열어봤다.
결과는
'Minor revision(논문의 연구내용과 수준은 인정됨. 사사로운 수정 후 출판 가능)'
믿을 수 없었다.
이렇게 높은 저널에 투고했는데 결과가 마이너 리비전이라니. 사실 대부분 논문을 투고하면 리뷰 후 사사로운 수정이라도 'Major revision'으로 결과가 나온다. 그런데 이렇게 높은 저널에서 내 논문이 마이너 리비전으로 뜨니 자려고 누웠다가 너무 놀라 벌떡 일어났다.
너무 기뻐 거실로 뛰어나가서 와이프에게 이 기쁜 상황을 설명했다.
"자기야! 내 논문 높은 데 냈던 거 있잖아? 그거 결과 나왔는데 뭔지 알아?"
"응? 뭐야? 다시 적으래?"
내 흥분된 목소리에 와이프도 놀라서 날 쳐다본다.
"마이너 리비전이야!"
"어? 좋은 거야?"
"좋은 정도가 아니지. 이건... 대박이야!"
와이프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내 흥분된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럼 이제 진짜 졸업하는 거네?"
"응. 이제 진짜."
"와, 축하해. 좋은 일만 있네."
그렇게 난 박사 과정 중 3번째 논문을 한 번의 리젝 끝에, 지금까지도 내 커리어상 가장 높은 저널에 출판했다. 지도교수님도 이런 상황이 조금 의아하신가 보다. 하지만 이내 다음과 같은 이유로 내 논문이 accept 되었을 거라 분석하셨다.
"아마 김 박사 논문이 그 저널에서는 잘 못 보던 내용이고, 자기들이 주로 다루던 소재에 대해 직접 실험적으로 역학을 검증한 게 희소성이 있었던 것 같아."
그런가 보다. 논문 내용이 좋은 연구고 나쁜 연구고가 아니고, 본인들 저널에서 다루지 않는 새로운 주제나 실험을 보여줬다는 게 좋은 점수를 받았나 보다. 사실 요즘도 논문을 쓰면 주로 받는 리뷰어들의 의견은 "도대체 새로운 게 뭐냐? 니 연구 다 좋고 내용도 좋은데 이거 그전에 다 나온 거 아니냐?"이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들은 비록 억지스럽거나 엉터리일지라도 새로운 실험이나 분석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런 내용을 자신만의 신규성으로 밀고 나간다. 그런 시도들이 과학의 발전을 이끄는 것 같다.
난 성공적으로 세 번째 논문을 출판하고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교수님이 말씀하신다.
"그래, 김 박사. 논문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이건 또 무슨 말씀이시지? 또 쓰라고 하시는 건가?'
내 눈이 휘둥그레지는 걸 보고 지도교수님은 말씀하신다.
"계속 연구해야 해. 박사 학위 받았다고 논문 안 쓰면 연구자로 살아남기 힘들어."
"아, 네...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박사 논문 챕터 2 내용을 정리해서 논문을 써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난 또 울며 겨자 먹기로 논문을 투고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졸업한 지 벌써 몇 년이 지났다.
하지만 지도교수님을 만날 때마다 듣는 질문은 똑같다.
"그래, 김 박사. 요즘은 어떤 논문을 쓰는가? 논문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
박사 학위는 끝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작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논문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