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의 비밀

by 브로콜리

※ 주의. 이 글은 너무 침울하거나 우울할 수 있습니다. 그런 글을 싫어하시는 분은 제 브런치 다른 작품인 '언제가 가장 행복했니?'를 읽어 주세요. ^^


나에게는 출생의 비밀이 있다. 어디서 입양됐냐고? 친 부모님이 따로 계시냐고? 아니다. 난 원래는 계획에 없던 아이였다는 거다. 그럼 난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을까?

원래 부모님은 자식을 누나와 형 이렇게 둘만 두고 안 놓으려 했다. 그런데 형이 태어나서 보니 장애가 있었던 거다. 부모님은 울며 불며 이 병원 저 병원을 다니셨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부모님은 자녀를 한 명 더 낳자고 결정하셨고, 나를 낳으셨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큰 느낌이 없었던 것 같다. 초등학생이었던 난 부모님이 왜 병원을 여러 군데 돌아다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에서야 든 생각인데, 아마도 부모님은 장애가 아니라는 답, 아니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답을 듣고 싶었던 거 같다. 궁합이나 사주를 보러 다니다가 점괘가 좋지 않으면 원하는 점괘가 나올 때까지 다른 점집을 가는 것처럼, 부모님도 원하는 답을 듣기 위해 병원을 옮겨 다니셨던 것 같다. 하지만 선천적인 장애는 병원을 옮겨 다닌다고 해서 원하는 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만큼 당시에는 장애에 대한 인식과 보편화된 지식이 거의 없던 시기였다. 의료나 과학에 의존하기보다는 미신에 더 의존하기도 했었다. 가끔 동네에 계시는 무당 할머니께서 우리 집에 오셔서 점을 봐주시곤 했다. 기억에 남는 점괘는 형이 그때 그해를 넘기기 힘들다고 하셨던 거다. 그 뒤로 30년이 넘게 흐른 지금 형은 여전히 잘 살고 있다.


당시에는 일반인들에게 요즘처럼 다양한 장애명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저 지능이 좀 낮으면 자폐증이라고 말했고, 지체장애라고 했던 것 같다. 형도 자폐가 아닌데도 엄마는 항상 누가 물어보면 "제가 자폐가 있는 아가 있어가지고요"라고 시작하는 말을 하셨다. 지금도 엄마는 40년 이상 장애인 아들을 키우면서도 장애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신 것 같다.

누나가 중학생이었던 시절이다. 누나도 엄마가 하시는 말을 듣고 학교에서 동생이 자폐가 있다고 말했었나 보다. 누나는 상담에서 담임선생님이 "자폐가 있는 사람은 그림을 잘 그리거나 음악을 잘하는 등 뭔가 하나에 특별한 재능이 있을 수 있다"라고 하셨다고 했다. 당시 나도 무지했기에 정말 그런가 하고 형을 유심히 지켜봤다. 하지만 형은 자폐가 아니었기에 당연히 그런 능력은 없었다. 자폐가 있으면 정말 그런 특출 난 능력이 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형은 어릴 때는 음악을 쉬지 않고 들었다. 카세트테이프가 늘어져서 가수의 목소리가 유령처럼 길게 늘어질 때까지 들었다. 그럼 누나와 나는 당시 유행하던 길보드 차트(구르마에서 파는 음악 카세트테이프)를 사서 형에게 공급했다. 그럼 형은 또 그걸 집에서 하염없이 듣곤 했다.

조금 커서는 당시 공중전화 카드를 모아서 놀곤 했다. 카드를 세기도 하고 바닥에 쭉 뿌려두고 하나씩 다시 주워 담기도 한다. 이때 난 무슨 규칙으로 저 카드를 뿌렸다가 다시 담는지 유심히 살펴봤다. 결론은 규칙 같은 건 없고 그저 그런 움직임에 집중하는 것 같다. 일부러 카드를 몇 장 몰래 숨겨도 봤는데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심오하게 다시 주워 담는다. 역시 아무런 규칙이나 능력이 없다. 공중전화 카드는 세월이 흘러 신용카드로 변했다가 지금은 트럼프 카드로 변했다. 특별한 능력이 있었으면 좋으련만 형은 그저 천진난만하니 웃을 줄만 아는 그런 슬픈 능력뿐이었다.


이런 내 출생의 비밀은 나이가 들면서 형에게 약간의 부채의식으로 바뀌었다. 형이 장애가 있었기에 부모님이 자녀계획을 수정하셨고, 그로 인해 내가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내 삶을 살면서 결혼도 하고 자녀도 낳았다. 형이 없었다면 나도 없었고, 지금 내 옆에 있을 사람들도 못 만났을 것이다. 특히 내 자녀도 없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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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남으로써 미치는 영향은 결코 적지 않다. 각자 다 누군가의 친구이고, 누군가의 가족 구성원이고,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이다. 형은 태어난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면서 외부 세상에는 큰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우리 가족에겐, 특히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게 해 주었다는 점에서 그 영향은 엄청났다.

형이 바깥세상에 다하지 못한 그 영향력까지 끼치면서 살아갈 책임이 내게 있지 않을까. 과연 나는 그 정도의 영향을 끼치는 삶을 살고 있을까. 생각이 자꾸만 깊어지는 밤이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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