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뉴얼을 만들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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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실한 일잘러 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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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특수한 실험 장치를 활용해 실험을 하고 연구 데이터로 자주 사용한다. 고가 장치라서 그런지 데이터가 품질이 좋고 시각적으로도 타인에게 설명하기 좋다. 그동안 다른 박사가 관련 실험 장치를 주로 사용했기에 나는 그 실험장치 사용법을 익히는데 여간 고생을 한 게 아니다. 혹시 담당자가 아닌 인력이 섣불리 사용했다가 오작동이나 셋업에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장비 담당자가 실험장비를 철저히 관리하고 나에게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어렵게 사용법을 익혀 노하우도 점차 쌓여갈 때쯤 측정이 필요한 데이터가 점점 늘어갔다. 와중에 연구원 행정 등 여러 업무가 중첩되면서 업무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같이 일하는 후배에게 단순 측정과 관련된 기술을 가르쳐 주고 업무를 좀 더 효율적으로 하고자 하였다. 비록 그전에 장비를 담당하던 박사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노하우를 알려주지 않아 기술을 혼자서 익히듯이 배웠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후배를 활용하면 더 고품질에 측정과 많은 데이터를 취득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열심히 나만의 노하우를 전수했다. 이 측정이 얼마나 좋은 데이터를 뽑을 수 있으며 가치가 있는 실험인지 납득시켜서 후배가 프라이드를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후배는 조금 느렸고 굼뜬 게 있었지만 묵묵히 시간을 들여 연습을 했다.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후배가 부서원들에게 단체로 쪽지를 하나 보냈다.
"○○ 실험 장치 사용과 분석에 노하우가 필요해서 모두가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간략한 매뉴얼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측정 시 활용 바랍니다."
나는 매우 당황스러웠다. 후배가 매뉴얼을 만들어야겠다고 하길래, 몇 번 완곡히 반대 의사를 전달한 나였다.
"기업에서 업무 시에 그런 매뉴얼화는 일반적이지만 연구원에서 연구와 관련된 실험이나 분석 방법을 매뉴얼화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어요. 그건 좀…" 의견 전달이 잘 되지 않았나 보다.
물론 기업에서도 근무한 경험이 있는 나에게 그런 매뉴얼 작성과 공유가 그렇게 생소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런 부분은 대부분 업무 절차나 사내 시스템 사용 방법 등에 대한 내용이었다. 개인 연구 방법론이나 실험 노하우, 실험 장치 사용 노하우 등을 이렇게 공유하는 게 맞나 싶었다. 조금 과장한다면 실험장치 사용 노하우는 연구 노하우나 마찬가지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고생해서 익힌 노하우인데...' '이제 누구나 할 수 있게 되면 내 가치는?' '나만 알고 있는 게 내 가치를 높이는 게 아닐까? '
다른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었다. '조직 전체로는 좋은 일이긴 한데?' '후배가 열심히 배워서 정리한 건데...' '내가 너무 이기적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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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가 말하는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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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민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전 세계 연구자들이 이 주제를 오랫동안 연구해 왔다.
[조직 관점: 공유해야 한다]
연구에 따르면 지식 공유는 지식 관리 프로세스의 핵심이며, 조직의 지속 가능한 경쟁 우위는 직원의 지식 공유에 크게 의존한다고 한다. 조직 문화, 지식 공유, 조직 혁신이 경쟁 우위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즉, 조직 입장에서는 지식 공유가 경쟁력이다.
[개인 관점: 보류해야 한다]
하지만 다른 연구는 정반대를 말한다. 직원들은 경쟁 우위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지식 보류를 하며, 전문성이 널리 공유되는 것을 방지하여 조직 내에서 자신이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되도록 한다고 한다. 지식은 개인의 사적 자산, 권력의 원천, 불확실한 환경에서 직업을 유지하는 방법, 해고에 대한 보험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즉, 개인 입장에서는 지식 보류가 생존 전략이다.
[결국 둘 다 맞다!]
흥미로운 건 이 연구들이 모두 일류 학술지에 실린 검증된 연구라는 것이다. 즉, 둘 다 맞는 말이다. 조직에게는 공유가 이득이고, 개인에게는 보류가 이득이다.
이게 바로 연구원들이 느끼는 딜레마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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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가 제시하는 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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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답은 무엇일까?
연구들은 흥미로운 해법을 제시한다. 조직은 사람, 도구, 과업의 상호작용에 지식을 내장한다. 그러면 내부적으론 지식 전달과 이전 외부적으로 지식 이전 방해를 모두 수행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지식에는 층위가 있다.
[명시적 지식 (Explicit Knowledge) - 70%] 문서화 가능한 지식. 절차, 프로토콜, 기본 사용법. → 이건 공유해야 한다. 조직 효율에 기여한다.
[맥락적 지식 (Contextual Knowledge) - 20%]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 트러블슈팅, 최적화 방법. → 이건 선별적으로 공유한다. 신뢰하는 후배에게만.
[암묵적 지식 (Tacit Knowledge) - 10%] 개인에 내재된 지식. 직관, 감각, 고급 노하우. → 이건 보호한다. 쉽게 이전되지도 않는다.
연구에 따르면 암묵적 지식은 종종 표현하기 어려워 측정 및 이전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즉, 자연스럽게 보호되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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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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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가 만든 매뉴얼을 보니 기본적인 절차만 잘 정리되어 있었다. 70%에 해당하는 명시적 지식이었다. 나는 생각을 바꿨다.
'이 정도면 괜찮다.' '오히려 이제 기본은 매뉴얼로 배우고, 내게는 고급 질문만 오겠네.' '내 시간도 절약되고, 조직에도 도움이 되고.'
하지만 여전히 내가 가진 20%의 맥락적 지식과 10%의 암묵적 지식은 따로 있었다. 후배가 아무리 매뉴얼을 만들어도 그건 문서화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실제로 매뉴얼이 공유된 후에도 부서원들은 여전히 나에게 묻는다. 핵심 노하우나 까다로운 측정은 매뉴얼로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깨달았다. 70%를 공유해도 나의 가치는 여전히 남아있다. 오히려 기본을 모두가 알게 되면서 내 고급 노하우가 더 빛을 발한다.
호구와 이기주의자 사이에서 적절한 밸런스가 중요하다.
전략적으로 층위를 나누어 공개하는 것. 그것이 현명한 연구원의 자세가 아닐까. 기본은 공유하되, 핵심은 보호하라. 조직에 기여하되, 개인의 가치는 지켜라. 그게 연구원으로 살아남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