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아진 시야

내가 아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다

by 브로콜리

어릴 적 부산 남포동에 먼 친척 숙모님이 계셨다.

어린 눈에 봐도 뭔가 달랐다. 손목과 목에는 금덩이들이 주렁주렁했고, 호피 무늬 무스탕은 어딘가 위압감이 있었다.

아버지를 포함한 어른들은 명절에 모이면 고향 사람들 이야기가 많았다. 누구는 뭘 한다더라, 누구는 TV에도 나온다더라, 누구 집 아들은 판사가 됐다더라.

경남 산청이 고향인 아버지는 이름만 들어도 외진 '산청 땅골' 출신이셨다. 당시 난 그 작은 시골에서 생각보다 잘된 분들이 많구나 싶었다.

━━━━━━━━━━━━━━━━━━

공무원이지 뭐

━━━━━━━━━━━━━━━━━━

하루는 마을 어른 아들 이야기가 나왔다.

"OO 이는 미국에서 박사까지 했다더라."

누군가 말하자 자리가 술렁였다. 아버지뿐 아니라 많은 어르신들이 중학교 졸업장도 드문 분들이었다.

"미국에서 공부를 했다고? 그래, 지금은 어디서 일하는고?"

남포동 숙모님이 대답하셨다.

"대전에 어디 연구소 다닌다던데."

"이야, 대단하다. 훌륭한 일 하네."

미국 박사, 대전 연구소. 친척 어르신들은 경외심이 역력했다.

그때 숙모님이 말씀하셨다.

"공무원이지 뭐. 뭐 다르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분은 대전 정부출연연구소에 다니셨던 것 같다. 공대생들에겐 꿈의 직장이다. 하지만 남포동 숙모님에게 그건 그냥 공무원이었다. 이름 있는 연구소도 공학박사들에게나 가치 있는 곳이지, 다른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저 동사무소 같은 정부 기관일 뿐이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

시각이 다르다

━━━━━━━━━━━━━━━━━━

그 짧은 한 마디가 오래 기억에 남았다.

같은 사람을 두고 어떤 이는 경외했고, 어떤 이는 대수롭지 않게 봤다.

누가 맞고 틀린 게 아니다. 그저 각자 살아온 세계가 다르고 시각이 다를 뿐.

남포동 숙모님은 큰돈이 오가는 세계에 있었다. 그 세계에서 월급을 받는 사람은 학위가 몇 개든 결국 '월급쟁이'였다. 반면 시골에서 어렵게 자란 친척들에게 미국 박사란 상상도 못 할 세계의 이야기였다.

사람은 자기가 아는 세계 안에서 판단한다.


가끔 학교에서 만나는 교수님들, 연구원들을 보면 자기들만의 세상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산업계에 계신 분들과 이야기해 보면 그분들도 마찬가지다. 직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은 학위를 '고작 공무원 준비'로 보고, 학위를 가진 사람은 현장 경험을 '이론도 모르는 기술자'로 본다.

미국 박사도 공무원으로 보이는 세계가 있고, 그 공무원이 꿈의 직장인 세계도 있다.


직장을 다니며 공부를 병행하는 직장인 학생은 두 세계를 동시에 산다. 어떻게 보면 피곤한 일이지만, 어떻게 보면 강점이기도 하다. 한 세계에만 있는 사람보다 조금 더 넓게 볼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직장인 학생에겐 넓은 시야라는 강점이 있다.

내가 아는 세계가 얼마나 좁은 지를 아는 것. 그 겸손함이 직장에서도, 연구에서도 필요하지 않을까.

━━━━━━━━━━━━━━━━━━

나는 지금 어느 세계에 갇혀 있을까.

ChatGPT Image 2026년 3월 9일 오후 09_22_14.png


매거진의 이전글호구와 이기주의자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