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놈을 만나다

by 브로콜리

업체와 과제를 기획하고 있던 중 일이다. 업체 팀장이 미팅을 요청했다. 일정을 급하게 잡더니 회의에서 무리한 부탁을 했다. 연구원인 우리에게 연구 결과를 마치 제품 납품과 동등하게 보고 사후 유지보수까지 요구했다. 그런 경우는 처음이라 어리둥절했다.

"과제 끝나면 나 몰라라 하실 건가요?"

마치 연구하시는 분이 양심이 없어요?로 들렸다.

또 하나, 과제 종료 후에도 연구를 더 해달라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연구하시는 분이 그런 게 안 궁금해요? 난 계절별로 어떻게 변할지 너무 궁금한데"

이건 또 뭘까? 해당 전공 전문가는 난데 본인이 더 전문가인 거 같다. 사실 전공자인 내가 볼 때는 교과서만 봐도 다 나오는 말도 안 되는 의견이었다. 시간 낭비적인 일이고, 프로젝트 종료 후 그걸 우리가 더 할 이유도 없었다.

이 분은 이런 협상법이 몸에 익숙한거 같다.

먼저 일정을 급하게 잡았다. 우리가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우리가 생각할 틈도 주지 않았다. 그 상태에서 예상 밖의 요구를 던졌다. 당황한 우리는 대답을 못 했다.

그다음 "연구하시는 분이 그런 게 안 궁금해요?"라는 질문으로 연구원의 기준과 자존심을 건드렸다. 나는 연구자니까 당연히 더 궁금해야 한다는 말이다. 거기에 못 응하면 내가 마치 열정 없는 연구자처럼 되는 거다. 거절이 어려워졌다.

미팅이 끝난 후, 나는 한참을 고민했다.

왜 나는 그렇게 당했을까? 왜 그 순간에 명확한 대답을 하지 못했을까?

"과제 끝나면 나 몰라라 하실 건가요?"라는 질문에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아니요. 약정된 범위 내에서는 끝까지 책임집니다. 다만 추가 요청은 별도로 논의하겠습니다."

간단한 한 문장이었다.

"좋은 질문인데, 이건 별도의 계약과 예산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자리를 바꿔서 정식으로 논의하겠습니다."

이 문장도 마찬가지였다. 미팅 중에 바로 말할 수 있었다.

가장 아쉬웠던 건 "연구하시는 분이 그런 게 안 궁금해요?"라는 질문에 당당하게 내 의견을 말하지 못했다.

"맞습니다, 궁금합니다. 그래서 독립적인 후속 연구로 진행하고 싶습니다. 이 과제의 범위 내에서는 약정된 결과물까지만 책임집니다."

이 문장이었다면, 나는 연구자로서 자존심도 지키고 상대에게 무례하지 않을 대답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 상황에서 내가 필요했던 건 더 강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명확함이었다.

강한 협상가를 만났을 때, 당신이 더 강해질 필요는 없다. 당신이 명확해지면 된다.

다음에 또 강한 협상가를 만나면, 나는 더 이상 어리둥절하지 않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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