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OO 학술대회에 발표 하나 하세요!"
발표거리가 있건 없건 가서 발표를 해야 했다. 처음엔 그게 이상했다. 학술대회는 연구 내용을 공유하고 토론하는 자리인 줄 알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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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에 오고 나서야 알았다. 학술대회에 참석하는 이유가 생각보다 다양하다는 걸.
첫 번째는 실적이다. 정부 프로젝트에 참여하면 정량적 목표가 따라온다. 논문, 학술대회 발표, 행사 참여 같은 지표들. 그중 학술대회 발표는 비교적 부담이 적은 실적 항목이다. 그래서 과제 참여기관들이 단체로 학술대회에 몰려온다. 참여 연구자는 보통 1~2개 발표가 의무다. 기업에 있을 땐 내 연구내용을 발표하기 위해 학술대회에 참석했지만 연구원에선 여러 가지 행사가 학술대회에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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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네트워킹이다. 어떤 기관에 누가 있고 무얼 하는지 알아야 정부 프로젝트 컨소시엄에 끼어들기가 쉬워진다. 정부 프로젝트 심사위원은 대부분 학회에 나오는 얼굴들이다. 평소 안면이 있으면 평가자와 발표자로 만났을 때 달라진다. 밀어주고 끌어주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의도적으로 네트워킹을 하러 다니는 분들도 많다.
나는 지극히 I 타입이라 그게 잘 안된다. 아는 얼굴을 봐도 선뜻 다가가지 못한다. 왠지 상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누구더라?' 할 것 같아서.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학술대회에서 석사 때 지도교수님을 오랜만에 뵀다. 반갑게 인사를 드렸다. 교수님은
"잘 지내지?" 하셨는데, 표정에서 느낄 수 있었다.
'긴가민가 하시는구나.'
다음 날 만찬장에서 내 이름표를 보시고는 해맑게 웃으시며
"잘 지내지?" 하셨다.
어제와 똑같은 인사였다. 사회생활엔 철판이 필요하다는 걸 그때 다시 느꼈다. 난 그러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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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는 휴가다. 학술대회는 보통 봄과 가을, 일 년에 두 번 열린다. 장소는 제주도나 여수 같은 관광지가 많다. 덕분에 난 매년 제주도를 한두 번은 간다. 학술대회만 찍고 관광 다니기 바쁜 사람들을 보면 뭐라 하기도 애매하다. 나도 좋은 곳에서 연구 스트레스만 받는 건 반대니까. 그래도 자기가 관심 있는 발표 하나쯤은 챙기는 게 맞지 않나 싶긴 하다.
포스터를 걸어두고 발표자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학회에서 '노쇼'로 지도교수에게 통보한다고 하는데, 교신저자가 노쇼 당사자이면 그것도 소용없다. 그렇다고 퇴출시킬 수도 없다. 학술대회 등록 인원이 학회의 주요 수입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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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브이에서 가끔 '해적 학술대회', '해적 저널' 이야기가 나온다. 저런 교수님들이 왜 저런 데 참석하지 싶었다. 연구원에 오고 나서야 이해가 됐다. 부실한 학술대회나 저널도 누군가는 필요로 하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는다. 학술대회 하나만 봐도 이렇게 많은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간다.
연구자들이 순수하게 연구만 하는 세계라고 한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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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춘계 학술대회로 제주도 출장 일정이 잡혔다. 발표 주제는 이미 다 정해져 있고 내용도 어느 정도 준비되었다. 하루 이틀만 주면 후딱 발표자료를 만들 수 있다. 과제 실적으로 한 개 잡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