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나는거 있으세요?”
“남편 처음 봤을 때가 기억나. 수원역에서 처음 보고 한 눈에 반했었지. 얼마나 멋있었는지 몰라. 근처에서 친구들이랑 호떡을 사먹으면서 멍하니 남편만 쳐다보고 있었어. 무슨 전단지같은 걸 나줘주고 있었는데, 내 눈빛을 의식했는지 갑자기 내 앞으로 오더니 그걸 하나 주더라고. 가슴이 두근거려서 혼났지. 동그랗고 뽀얀 얼굴에 큰 키도 아니었는데 내 눈에는 정말 멋있었어.”
“친구들은 누구였는지 생각 나세요?”
“옥현이랑...... 수, 수, 뭐였는데...... 잘 기억 안나.”
“어머님이 입고 있던 옷은요?”
“잘 모르겠어. 남편은 기억하려나, 근데 물어볼 수가 없네. 하하하. 그때만해도 무슨 용기가 났었는지 호떡 든 손 그대로 가서 말을 걸었지.”
“먼저 말을 거신거에요?”
“응. 뭔가에 홀린 듯 전단지를 받아들고, 안녕하세요, 멋있으시네요, 라고.”
“어머, 어머님도 참.”
“후후후...... 지금은 이목구비가 잘 생각이 안나. 명주가 얘기했는지 모르겠지만, 오래 전에 죽었거든. 병으로.”
“어머니.”
“응?”
“어머니 오늘 오전에 한번도 다른 말씀 안 하셨어요. 그거 아세요?”
“응?”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계속 괜찮으셨어요. 이렇게나 예전 기억도 잘 해내시고요.”
“내가, 그랬어?”
“네. 정말 잘 하고 계세요. 이제 비교적 최근 기억 하나만 더 생각해볼 수 있으시겠어요? 진오가 태어났을 때, 기억 나시죠?”
“어, 기억이 안나. 진오가 손주라고 하니까 그런가보다 하지, 그 당시에도 내가 정신이 없을 때였나봐. 사위얼굴도 모르겠고, 명주, 그 불쌍한 것. 그런 것 까지는 안 닮아도 되는데. 남편 빨리 잃는 것까지 닮을 필요가 뭐가 있어.”
“어머니, 잘하셨어요. 오늘은 여기까지 해요.”
“...... 짜니까 피자 그만 먹어요. 건강에 안 좋아요. 그...... 짜니까......”
“네, 알았어요, 어머니. 짠 거 안 먹을께요.”
현정은 다시금 머릿속 실타래가 엉킨 듯한 느낌을 받는지 눈가를 찌푸리며 다른 말을 한다.
선재는 현정이 신약에 대해 좋은 예후를 보이고 있어서 보람을 느꼈다. 인지장애를 비롯한 질병들은 낫기가 어렵다는 어쩌면 매너리즘에 빠진 기술과 신념, 선재와 근영은 그런 종합적인 한계를 넘어서고 싶었다. 1주에 한번 치매 어르신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기억을 스스로 되살려보는 대화를 했다. 치매관련 약에 관심을 보이는 작지만 탄탄한 스타트업 제약 회사와 함께 신약을 개발하고, 임상실험을 거쳐 현정과 다른 10명의 어르신께 적용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중 현정은 예후가 매우 좋았는데, 신약을 복용한 후 부터 분명 본래 자기 자신의 모습을 유지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
차트 번호 : 5
이름 : 조현정
상담일 : oo년 9월 15일
투약 : 하루 2번
상담내용 :
지난번에 비해 지남력, 기억력, 인지능력 향상. 과거 기억력은 비질환상태과 비슷한 수준, 최근 기억력 회복은 아직 힘든 것으로 보임.
}
“어르신, 왜 식사를 안 하실라고 허신데요.”
“안 먹어. 내가 준 돈 다 어디있어?”
“얼른 드셔요.”
“내가 준 돈 어디다 놨냐고!”
“아, 내가 어찌게 안데요. 어르신이 다 갖고 있음서 왜 나한티 물어본당가요.”
“내가 어제까지만 해도 여그, 바지주머니에 넣어놨는디 없잖여. 나랑 맨날 붙어있는 니가 가져갔응께 없지! 어따 놨냐고, 내 돈!”
“참말로 어르신때미 나가 환장하겄당께.”
“뭐라고? 이 년이.”
유정례할머니는 깡마른 손을 들어 주연을 때리려는 듯 위협을 한다. 주연이 당황하지 않고 유할머니의 손목을 텁하며 잡아버리자, 유할머니는 힘없이 나폴거린다. 그러고선 유할머니의 허리에 채워진 낡고 때가 굳은 오래된 장사주머니를 가로챈 뒤 지퍼를 쭉 소리가 나게 열어 통장을 꺼낸다.
“놓아, 놓아, 이년아.”
“어르신, 이년아, 이년아 하지 말랑께요.”
“이년이 어디서 나한테 말대꾸를 혀!”
“어르신 그러믄 이 통장 가지고 은행에 가보면 될 것 아이요. 통장정리를 해불면 돈이 있는가 없는가 알 것 아이요.”
“내놔, 이년아. 내놔!”
유정례할머니는 주연의 손등을 날카롭게 할퀴며 누가 훔쳐라도 갈세라 통장을 낚아챈다. 주연은 다친 손등을 비비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한다.
“밥부터 자셔. 언넘. 나랑 은행 가서 돈 얼매나 있는가 보러 가장께.”
“......”
“아, 꼬륵꼬륵 소리 나잖여. 어르신땜에 밥상도 여태 못 치워불고 어르신이 지금 여러사람 일 못하게 하잖요. 언넘 잡솨. 언넘!”
주연의 성화에 마지못해 입을 천천히 벌리는 유정례할머니는 밥을 몇 번 씹지도 않은 채 꿀꺽 삼켜버리며 다시 말을 시작한다.
“가, 인자. 가보자고. 내 통장에 돈 없기만 해봐어디. 내가 가만있나. 우리 아들이 가만 안 있는당께.”
“어르신, 은행 갔다가 내가 할말이 있응께. 잘 들으쇼. 어르신이 꼭 알아야 할 내용잉께. 우리가 어르신 여기 계시는 동안 아들 소식하고 다 알아봐놨당께. 통장에 돈 확인하고 나서는 내가 하는 말 다 믿어야요. 알겄어요? 다들 어르신 도움 줄라고 일하고 있잖여요. 나부텀도 이렇게 못 믿으면 누가 어르신을 돌봐드리고 싶으까요. 아들도 몇 달 째 안 왔잖요.”
갑작스러운 주연의 정색과 차분한 말투에 유할머니의 태도가 약간 주춤해졌다.
“우, 우리 아들은 바쁭께 그라지.”
“아들이 왜 안 오는지 내가 알려줄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