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출라

소박한 우리

by 따바라중독자

"제 차례인가와용~ 갔다올께영~!"


노랑이가 갈 시간이에요. 노랑이가 하는 일은 알지네이트(치과에서 치아모양을 본뜨는 재료)랑 물이랑 섞는 일이에요. 치과에서 환자들의 치아 모양을 찍어낼 때 노랑이가 있어야 한데요. 직원 손에 단단히 잡혀서 온몸이 고무그릇에 붙은 채로 빠르게 왔다 갔다 뛰어다니면 예쁜 핑크색 반죽이 된다나요. 그럼 그걸 노랑이가 들어 틀에 담고 나면 노랑이의 할 일은 끝이래요.


노랑이가 알지네이트와 물을 섞으며 일하는 모습


노랑이는 예전에는 쉴 틈도 없이 일했었데요. 그나마 최근 들어 환자들의 치아 모양을 찍어내는, 쉽고 새로운 애들이 있어서 노랑이가 조금 더 편해졌다고 하더라고요. 노랑이가 일하고 오면 그다음은 내 차례예요. 나는 노랑이보다 더 단단하고 탄력이 있는 금속으로 되어 있어요. 손잡이는 나무로 되어 있고요. 노랑이는 알지네이트와 물을 섞지만, 나는 석고와 물을 섞어요. 알지네이트가 찍어온 환자의 치아 모양 위로, 나는 물과 섞인 석고를 흘러 들어가게 해요. 그렇게 알지네이트 위로 석고가 채워지면 환자의 치아들이 그대로 복사가 되지요. 신기하죠?




우리 넷은 이 치과가 새롭게 문을 열 때 원장님의 재료 상자에서 같이 나왔어요. 직원들은 개원할 때 원장님이 우리를 새로 산 줄 알지만 사실 우리는 14년 전부터 원장님과 함께 일했답니다. 고무그릇하고 갈색 유리병도 함께요. 그때부터 우리의 집은 항상 갈색 유리병이었어요. 사실 우린 다섯이었는데 여기 이사 와서 노랑이 하나가 열정 있는 직원의 힘찬 손놀림에 부러지고 말았어요.ㅠㅠ 그래서 지금은 노랑이 둘, 나무손 둘 이렇게 넷이 오순도순 살고 있지요.


우린 욕심이 없어요. 그저 이 자리를 지키다가 직원 손에 쥐어져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환자들을 도울 뿐이에요. 항상 똑같은 자리와 똑같은 일을 하는 우리에게 어느 날 특별한 일이 일어났어요. 우리가 이사를 하게 되었지 뭐예요!! 실장님은 우리를 모두 꺼내고 목욕을 시켜줬어요. 그리곤 말끔하고 투명한 새로운 집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투명한 우리집

'어이구구~ 안녕하심까~ 여기는 투명해서 좋네. ㅎㅎㅎ 그치?'

'와아 여기는 환하다앙~! 여기 너무 좋아용~!'

'이런 데서 살아야지. 스파출라로 태어났으면 밝게 살아야지. 암만.'


우리는 너무나 기뻤어요. 갈색병 속에 있을 때는 사실 조금 답답했거든요. 윗부분만 보이고 아랫부분은 밖을 보아도 죄다 희미한 갈색이거나 그냥 어둠이었어요. 그런데 이 투명한 집은 정말 마음에 들어요! 우리가 들어가 있는데도 밖이 다 보여요! 어떤 때는 우리가 부웅 떠있는 느낌도 들고요, 좋아요!

우리는 좋았는데 처음에 투명한 집은 약간 시무룩했어요. 자신의 다음 임무?가 있었는데 갈색병에게 양보했데요. 우린 태어나서 한 가지 일만 하는데, 투명한 집은 다른 일을 또 할 수 있데요. 와아~ 정말 대단한 집이었어요! 우리가 이런 집으로 이사를 오다니요!


'와앙~! 진짜 멋있다앙~! '투명한 우리집'은 다음 임무가 뭐였는데용?'

'대단하신 분이었어!!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었는데 우리를 이렇게 보호해주고 있어!! 고마우신 분이야!!'

'붕붕 떠있는 느낌도 주고 힙하신데 다른 일도 하실 수 있어요? 와아~~!!'


우리는 '투명한 우리집'이 궁금했어요. 우리가 떠들어대자, 우리의 투명한 집은 기분이 조금 나아진 것 같았어요.


'흠흠~! 우리들은 식염수가 다 나오면 주로 버려지지만 나처럼 선택받은 몸은 '다음 임무'라는 게 있어요. 혹시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꽃이 무엇인지 알아요? 그건 바로 백합꽃이에요. 백합꽃은 하얗고 도도하고 예뻐요. 바로 내가, 그 백합꽃의 집이 될 뻔했지요.'

'와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의 집이요? 와아~~!!'

'우아한 백합이 담긴 투명집이라~ 너무너무 예쁠 것 같아용~!'

'그런 일도 하고, 자네는 참 멋진 집이구만~!


'크흠! 백합꽃은 예쁘지만 내,내가 갈색병한테 양보했어요. 어여쁜 백합꽃을 위해서는 그게 더 좋을 것 같아서요.'


'우왕~~ 투명한 우리집은 정말 멋있는 분이에영~!'

'아름다운 이의 집이 되는 걸 양보했다고? 겸손하신 분이야~!!'

'능력도 많으신데 우리집이 되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 넷은 투명집이 좋아요. 투명한 우리집도 우리를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누가 봐도 잘라낸 플라스틱에 꽃을 꽂기는 좀 그렇겠지? 백합꽃이 참 예쁘고 싱그럽다. 어쩜 이렇게 향기도 진할까? 그래! 저기 있는 저 갈색병에 꽂으면 되겠다. 스파출라들이 꽂혀있던 갈색병에 백합꽃을 꽂아 진료실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두었다. 오는 환자마다 그곳에 눈길을 준다. 잘 어울린다. 좋은 선택이다.


갈색병에 꽂혀 있던 스파출라는 잘라놓았던 식염수 통에 다시 꽂았다. 어차피 직원들만이 올 수 있는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도구니까. 하찮은 도구들이라도 새로운 곳에 담으니 공간이 새로워진 기분이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저들에게 일회용으로 버려질 허름한 플라스틱 식염수 통을 준 게 조금 미안하다.


치과에는 스파출라가 많다. 노랗고 곡선의 형태를 지닌 것, 금속에 나무손잡이가 달린 것, 그 밖에 두 가지 다른 성분이나 형태로 되어 있는 치과용 재료들을 섞어주는 파란색의 얇고 좁은 형태의 것. 많은 치과용 재료들을 목적에 맞는 용도로 쓸 수 있도록 해주는 스파출라는 무심하게 치과 한쪽에 자리한다. 이것이 없는 치과는 없겠지만 혹시 없다면 다른 물건으로 대체할 수도 있겠다. 가격도 비싸지 않다. 그런 존재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있는 것들.


노동하는 평범한 모든 사람들은 스파출라 같다. 몸값이 그다지 비싸지 않고, 각자의 일을 매일 똑같이 하며 항상 그 자리에서 쓰임이 있을 때에 노동하는 것, 그렇다고 쓸수록 눈에 띄게 닳거나 하진 않지만 누군가 세게 잡고 압력을 많이 주면 그냥 끊어져 버리는 것, 남들에게 보이지 않으니 저렇게 허름한 플라스틱 용기 속에 있어도 별 상관없는 것, 유기적으로 돌아가야 하는 형편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부분의 노동을 하지만, 그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조차 못하고 소모되는 것.


공간을 뺏긴 스파출라들은 서운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감성적인 매력을 뿜어내는 갈색병과 예쁜 백합꽃의 조합이 환자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을 질투할 수도 있겠다. 가서 플라스틱 통 한 번 세척하고 와야겠다. 먼지가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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