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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딱정벌레 Mar 10. 2021

상처의 재발(再發)

패여 아문 자국이 무심코 나를 할퀴어 올 때도

저는 지금 너비와 폭 그리고 높이가 불분명한 방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있습니다. 한 발짝 떼어볼까 싶지만서도 기댈 벽 하나가 아직은 보이지 않아 어느쪽으로도 발을 못 떼고 있습니다.


지금 전 어쩌면 평소에 의미없다 여겼던 누군가가 해주는 '다 괜찮아, 잘될거야' 같은 말 한조각이 필요한 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해답이 없는 상황에서는 값싼 위로라도 도움이 될 지 모르니까요. 저에게 흔쾌히 그런 말을 해 줄것이 분명한 내 친구들과, 또 몇몇가지 물음에 대한 답을 알고있음직한 몇몇 이의 얼굴이 떠올라 연락을 넣을까 하다 그만두었습니다.


저는 지난 두어 달 간 금주해왔습니다. 어느 때보다 맨정신으로 부딪히고 싶어서라고 말했지만, 사실 저의 고질적인 이 단점을, 나를 사랑해준 이들에게 오래간 실망감을 주어 왔던 반복을 끝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휴대폰을 내려놓고 방금 딴 맥주를 한 모금하자, 이 좋은 걸 왜 그만둘까 싶었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 그 새에 우연찮게 아까 떠올렸던 이가 연락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아까 맴돌았던 물음을 묻기에 아주 적절한 시기였지만 저는 그것에 관하여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아니 꺼낼 수 없었습니다. 제 질문이 사실은 누구에게 물어볼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서요, 그리고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서요.


잘 사는 척 해오다가 오늘 갑자기 막막해져 버린 것은, 오래된 상처 하나가 떠올라서 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비밀편지라는 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상처라는 것은 테이프를 붙이게 하는 것이라고요. 사람들 눈에 보이는 곳에는 조금만 붙이지만, 한 번 터진 기억이 있는 곳에는 밑바닥에는 덕지덕지 테이프를 붙이게 하는, 상처라는 것은 늘 그런 것이라고요. 오늘 그 오랫동안 껴안고 있었던 상처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반 병을 넘기고 나니 아까 몇몇 이에게 연락을 하고 싶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이 났습니다. 사실 이것에 대해 저는 이미 여러 번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였었거든요,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묻고 조언과 대답을 구하는 일 또한 이미 여러 번 해보았기 때문입니다. 성의가 있는 답과 없는 답을 모두 들어보았고, 논리적인 위로와 감성적인 위로를 모두 받아 보았습니다. 상처를 낸 당사자에게도 이미 오래 전 멋진 사과와 또 사랑을 받았습니다.


종합적으로 저는 이에 대해 넘치는 해답과 성의를 받았습니다. 그치만 저는 매번 상처를 잃어버리는 일에 실패해왔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 부분에 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입니다.


제가 이 상처를 버리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혹시 어쩌면 저는 이 상처를, 이 흉터를 마치 전쟁영웅의 그것처럼 내심 자랑스러워 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거 봐봐, 나는 산전수전을 겪어 이런 멋진 상처를 가지고 있어 이렇게요.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제 상처는 아주 구질구질한 모습이라서 보여주고 싶은 정도의 멋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군가가 이것을 보고 놀랄까봐 밑바닥에 잘 감추어야 하죠.


아니면 역시 저의 노력이 부족했던 것일까요? 적극적으로 그것을 딛고 일어날 용기가 부족했던걸까요? 미안하지만 저는 상처를 극복한다는 표현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상처는 사람을 소극적으로 만드는데, 어떻게 능동적으로 그것을 극복한단 말일까요.  


오늘도 아무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다시 테이프만 붙이고 말았습니다. 가능한 용량을 이미 넘어선 생각을 하다 보면 몸이 먼저 지쳐서 눕고, 잠이나 자자 그리고 잠시 잊자 하고 내일이 되면 또 괜찮아 진 것 같을 것이거든요. 제가 그 상처를 논개처럼 끌어안고 있는 것이든, 상처가 제게 달라붙어 있는 것이든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제가 그저 이 상처와 함께라도 괜찮게 살면 그만이겠지요.


저는 오늘 이 맥주 한병만 마시고, 푹 잔 다음에 내일 조금 괜찮아진 기분으로 이 글을 보고 뭐야 오바했네 라고 생각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오래 동안, 여러 번 반복해 왔으니까요. 연습이 완벽을 만든다더니, 놀랍게도 상처를 다시 후벼내기도 여러번 하면 요령이 생기더군요.


내일 아침이 되면 이곳은 익숙한 제 방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면 벽을 짚고 일어나 한 발짝 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그만 울고 이 자리에 누워서 잠이나 한숨 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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