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딱정벌레 Apr 02. 2021

아픔이 길이 되려면

아픈 자국이 이리 선명한 것이, 길이 되려 그랬나봅니다.

제 몫의 슬픔을 온전히 마주하려 들여다봅니다.

이미 지나쳐왔던 슬픔의 흔적들을 되짚어보니 겁이 나기도 하지만, 마주보고 온전히 아파해내는 것만이 이것을 흘려보낼 유일한 방법임을 알고 있습니다.

무언가가 계속 새어나오는 마음을 붙잡아 비우기를 시작합니다. 열어보니 믿음을 잃은 약속과 초라했던 고백은 벌써 길을 떠났습니다.

이제 고운 체로 좋은 기억을 건져 떠내고, 남은 의문과 미움을 조용히 흘려보낼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닿지 않고 어드메로 사라지길 바라면서요. 원래 정당치 않은 미움이니 금방 소멸될 것입니다.

그리고 좋았던 기억을 바람이 잘 불어오는 볕에 말리렵니다. 바삭하게 말라 멀리 날아가라고요. 한동안은 머물겠으나, 마지막엔 남은 것이 없도록요.

모든 것이 지나가고, 아픔이 흘러간 후의 저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에게 뿐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우선이요.

아픔은 아픔일 뿐인것을, 왜 아픔마저도 딛고 걸어야 하는것인지 궁금했던, 아픔을 교훈 삼는 것은 기만이라 생각하던 어느 날도 있었습니다. 이제 알겠습니다. 아픔이 낸 자국이 이토록 선명한 것은, 길이 되려 그랬나봅니다.

이번엔 더 잘 할 수 있을거예요. 이젠 더 괜찮은 방식으로요. 이 마음도 벌써 거진 다 비워져갑니다.

하나의 결정이 내려진 것 뿐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손에 든 짐을, 아마도 서로 잡은 손일 그것을 내려놓고 다른 길에 서기로 한 것입니다. 각자의 길은 다른 방향으로 계속될 것이며, 이 갈림목은 금세 보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제 바닥에 눌은 미련을 긁어냅니다. 다행히 많지 않습니다. 떼낸 자리가 아프지만 잘 모아 버린 후 끈적한 한 걸음을 떼면 비로소 이 길을 걷기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공허한 자리엔 한마디만이 남았습니다. 솜사탕같이 가벼운 이 녀석이 어떻게 맨 마지막에 남았을까요? 조심조심 집어 소리내어 비워냅니다.

참 고마운 사람, 고마웠습니다.



*제목: 김승섭 교수의 저서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차용

작가의 이전글 상처의 재발(再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