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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따시 Jan 12. 2020

베니의 좋은 연기, 영화의 불친절함

영화 [차일드 인 타임] 리뷰

좋은 메시지를 주는 영화는 관객들에게 따뜻한 감정을 전달합니다. 아마 다양성 영화를 찾는 분들의 대다수는 이런 느낌을 주는 영화를 찾으려고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상업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기 때문이죠.

누군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영화 많이 보면 다양성 영화 좋아하겠네?’ 아마 많은 분들이 그렇게 생각하실 것 같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저는 다양성 영화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싫다는 것은 아니지만, 다양성 영화라는 기준으로 구분하려고 하지 않고, 굳이 구분을 하자면 상업 영화를 조금 더 선호하는 편입니다. 이런 이야기로 시작을 하는 이유는 다양성 영화라는 이유로 더 좋게 보거나, 더 나쁘게 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과거의 저도 그랬지만, 별점은 낮게 주면서 감성적인 이야기로 영화의 메시지만을 강조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렇기에 조금은 솔직한 리뷰가 될 것 같습니다. 


영화 [차일드 인 타임]은 상영 시간에 나의 시간을 맞춰야 할 정도로 상영관이 소수로 배정되어 있는 영화입니다. 아마, 다양성 영화 전용관이 없는 곳이라면 이 영화를 보기 힘들 것입니다. 

영화에 대한 총평을 먼저 내리자면, [좋은 연기로 표현한 상실, 의도적인 설명 누락?]이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영화의 가장 포인트가 되는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연기는 상당히 훌륭합니다.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의 심정을 상당히 디테일하면서도 덤덤하게 표현하고 있죠. 영화의 톤 또한 그의 연기 톤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덤덤하게 표현하여서, 잃어버린 이후의 삶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영화 [생일]을 통해 보았던, 인물들의 일상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간단한 이야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을 것이지만, 이 영화는 따뜻한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부분에 인물들이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는 듯한 모습으로 영화가 마무리되지만, 영화는 내내 상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영화를 통해 따뜻함을 느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영화를 본 뒤에 저와 같은 상영관에 있던 모든 관객 분들이 쉽게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영화의 결말이 다소 급하게 나온 듯한 느낌이 있기도 하지만, 이들의 모습이 마냥 행복하다고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은 차분한 마음으로 극장을 나서게 되는 그런 영화가 되는 것이죠. 




총평의 앞부분에 대한 설명을 했다면, 이제부터는 뒷부분에 대한 설명을 하려고 합니다. 영화가 전체적으로 꽤 불친절합니다. 불친절한 영화는 그 의도에 따라 여러 가지 방향이 있습니다. 

가장 보편적인 것이 관객들에게 해석을 넘기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영화로 [라라 랜드]가 있을 것입니다. 영화는 어떤 결말을 맺는 듯하지만, 관객들의 해석에 따라 결말이 다르게 받아들여집니다. 두 인물의 멜로 이야기로 본다면, 새드 엔딩일 것입니다. 하지만, 두 인물의 꿈에 대한 이야기로 접근한다면 해피 엔딩이 될 것이지요. 이렇듯 영화는 여러 선택지를 제시하면서, 관객들에게 그 선택을 권유합니다. 그 선택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입니다. 최근에 개봉했던 [조커] 또한 그런 여지를 주는 영화라는 점에서 많은 분들의 다양한 해석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영화가 어떤 선택을 하기보다는 관객들에게 선택권을 넘기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관객들이 보기 불편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 또한 다양한 방법이 있습니다. 순서를 복잡하게 하거나, 보기 힘든 장면을 삽입하는 등 관객들로 하여금 거부감이 들게 하거나 생각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죠. 혹은 어떤 상황이나 감정에 대해서 영화가 설명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차일드 인 타임]은 설명하지 않아서 불친절한 영화입니다. 영화가 의도적으로 누락시키는 부분이 생겨서 영화의 전체적인 이해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찰스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자연으로 돌아간 찰스는, 스티븐과 자신의 아지트에서 조금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그의 선택에 대해서 영화는 끝까지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잠시 저만의 해석 시간)

물론 이는 어느 정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찰스는 자신이 일하는 정부기관에서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일을 하게 되고, 그것에 회의감을 느끼고 자연으로 돌아가서 본래의 자신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그것에 실패를 하게 된 것이고, 스티븐이 ‘너 답지 않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게 되면서 감정이 더 격해진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쉽게 예를 들자면, 흰 티에 검은색 물이 들어서, 물을 빼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티셔츠는 회색이 되어버렸던 것이죠. 자신은 흰색이 본래의 색이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검은색을 본래의 색이라고 생각했던 것이고, 회색이 된 티셔츠는 자신이 생각하는 본래의 모습도, 남들이 생각하는 본래의 모습이 아닌 것이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겪고 있는 상실감은 스티븐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스티븐의 상실감은 누구가 공감할 수 있는 조금 더 보편적인 감정입니다. 100% 이해를 할 수는 없지만, 그 감정의 크기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스티븐의 행동에 대해서 이해를 해주고, 위로를 건네지만 찰스는 그런 것조차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찰스는 감시를 받는 존재가 된 것이죠. 그렇기에 찰스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목적이 있어서 시작한 일에 목적이 사라지고,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도 실패한 것이죠.

하지만, 스티븐에게는 목적이 뚜렷하고, 그 목적은 평생도록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상실감을 상쇄시킬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결국, 상실이라는 것은 일상적인 것조차 마음 편하게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스티븐은 자신의 아내인 줄리와 마음 놓고 사랑을 하지도 못하고, 자신의 집 문을 잠그지 못합니다. 줄리 또한 그런 이유로 출산 직전까지 임신을 한 것에 대해서 쉽게 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스티븐은 케이트의 환상을 자주 목격하기도 합니다. 이 환상의 정체는 스티븐의 어머니를 통해서 알게 됩니다. 자신이 사랑하고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죠. 어머니도 그러한 경험을 했고, 스티븐도 줄리를 만나러 가는 과정에서 그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 모습이 보이는 이유는 그리움과 간절함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이죠. 스티븐이 케이트의 환상에 대처하는 자세가 바뀐 것이 이러한 변화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적응을 하면서 상실을 채워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죠.

결국 아무리 노력을 해도 상실이 있기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것에 집착을 하다 보면 더 참혹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찰스가 그런 모습을 가시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그와는 반대로 일상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상실을 인정하는 과정을 보여준 스티븐에게는 상실과 버금과는 새로운 기쁨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죠.

(해석 끝)


영화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과 표현을 하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조금 친절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TV 영화라는 특성상 시간의 압박을 받았던 것인지, 영화의 어느 순간에는 조금 서두른다는 생각이 드는 구간이 있습니다. 영화 시작부터 그런 느낌이 느껴지죠. 만약 이런 태도를 취하려고 했다면, 관객들에게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어느 정도 제공되었어야 합니다. 엔딩 크레디트도 너무 짧아서 감상을 정리하기 전에 상영관을 나서야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모습은 애초에 이 영화가 만들어진 환경 때문에 생긴 단점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불친절한 영화라는 점이 개인의 취향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죠. 한 편으로는 이런 점이 의도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영화는 스티븐의 이야기에서는 불친절하다는 생각이 안 들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이는 의도적으로 찰스의 이야기를 불친절하게 만든 것일까요? 지금에 와서 드는 생각은 찰스의 이야기를 우리는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것이 상실의 무게가 될 것입니다. 스티븐의 이야기는 조금은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감정을 이해한다는 착각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스티븐의 감정에 대해 짐작을 하고 배려를 해주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지만 찰스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영화의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그의 모습을 본 정부 관료의 모습은 그의 행동에 대해 의문을 가지거나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이상한 모습이라 취급하며, 감시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정부차원에서 만드는 육아 가이드라인 제작과정에서도 알 수 있죠. 자문을 받기 위해서 사람들을 불렀지만, 형식상의 과정이었고 실제로 그들의 의견은 하나도 반영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이해하는 척하지만 자신의 뜻대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이런 리뷰의 내용에 몇몇 분들은 ‘꿈보다 해몽’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저도 그 이야기에 동의합니다. 꿈보다 더 좋은 해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술이라는 것은 원래 그렇게 소비가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창작물은 사람들에게 생각을 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은 2차 창작물이 되는 것이죠. 이러한 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지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창작물이 나올 것이고, 그 속에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생각을 한다는 것은 정신적인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지속적인 생각은 더 나은 생각을 만드는 것이고, 그것이 사람을 성숙하게 만드는 것이죠.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이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원한다면, 자신부터 타인의 의견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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