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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라는 드라마에 빠진 사람들

맹목적인 감정 이입이 만들어낸 적과 끝나지 않는 클라이맥스

by 따따시

혹시 요즘,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일들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느끼신 적 있나요? 우리는 흔히 드라마에 몰입합니다. 주인공을 응원하고, 악역에 분노하고,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죠. 그런데 요즘은, 그런 드라마보다 더 강력한 몰입을 현실 속에서 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정치, 스포츠, 그리고 그에 대한 수많은 콘텐츠들. 이 모든 건 이제 드라마처럼 소비되고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드라마보다 더 자극적이고, 더 몰입도 높은 이야기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드라마에는 엔딩이 없습니다.


오늘은 바로 그 끝나지 않는 이야기, 정치와 스포츠라는 현실 속 서사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요즘 뉴스를 일부러 피한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실제로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 성인의 72%*가 최근 뉴스 소비를 의도적으로 줄였다고 답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정치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라고 해요. 그런데 이상하죠? 뉴스는 안 본다면서도, 정치 콘텐츠는 유튜브에서 수십만, 수백만 조회수를 기록합니다.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실시간 댓글은 폭발하고, 클립 영상은 다음 날까지도 계속 회자되죠.


스포츠도 비슷합니다. 경기를 직접 보는 것도 물론 재미있지만, 그 이후의 인터뷰, 유튜브 영상, 팬들의 분석과 리액션까지, 어쩌면 경기보다 더 많이 소비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흐름을 보다 보면, 정치도, 스포츠도 이제는 하나의 드라마처럼 소비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드라마에는 우리가 감정이입할 수 있는 주인공이 있고, 함께 분노할 수 있는 악당이 있으며, 다음 시즌을 기대하게 만드는 떡밥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끝나지 않는 드라마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동안 영화 속 이야기를 주로 다뤄왔습니다. 한 편의 영화 안에서 누가 주인공이고, 어떤 세계관이 펼쳐지는지, 그리고 그 이야기가 우리 감정에 어떤 울림을 주는지를 살펴보며 이야기를 나누어왔죠. 그런데 요즘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영화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이야기들이 어쩌면 우리 일상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게 아닐까? 정치도, 스포츠도 이제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하나의 서사로 소비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조금 다르게, ‘현실 속 드라마’의 구조와 감정의 흐름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감정이입은 서사의 입장권이다


드라마처럼 정치와 스포츠를 소비한다는 말, 그 자체가 반드시 나쁜 건 아닙니다. 누군가를 응원하고, 해석하고, 감정을 이입하는 과정은 그 대상에 애정을 갖게 되는 자연스러운 방식이고, 콘텐츠에 몰입할수록 그 산업은 더 활발해지기 마련이니까요.

정치에서 내가 지지하는 인물의 말과 행동을 하나의 서사처럼 바라보게 되는 것, 스포츠에서 특정 선수를 중심으로 응원하게 되는 것—모두 내 감정이 스토리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요즘엔 이 ‘스토리’가 무대 밖에서도 확장되고 있어요. 유튜브 클립, 인터뷰, 커뮤니티 해석, 팬들의 반응 영상까지. 특히 스포츠는 점점 아이돌 팬덤 문화를 닮아가고 있죠. 팀보다 선수를 응원하고, 경기력보다는 인성, 외모, 캐릭터에 반응하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현실 속 인물’을 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응원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몰입이 어느 순간 ‘선을 넘게’ 되면 문제가 시작됩니다.


정치에서는 내가 지지하는 사람의 말은 모두 옳고, 상대는 무조건 틀렸다는 생각에 빠지기 쉬워집니다. 특정 지역이 특정 정당을 거의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현상도 그런 몰입의 결과일 수 있죠. 스포츠도 마찬가지예요. 선수가 부진했을 때 나오는 비판조차 그 선수의 팬에게는 공격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팀의 팬’이 아니라 ‘선수 개인의 절대적 지지자’가 되는 겁니다.


감정이입은 강력한 몰입의 힘이지만, 그것이 어느 순간 맹목이 되고 다른 생각이나 비판조차 용납하지 못하게 되면, 그건 더 이상 건강한 소비가 아닙니다. 그때부터는 이야기를 즐기는 게 아니라,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위치만 고집하게 되는 순간이 되는 거죠.


사람들은 점점 비판조차 허용하지 않는 감정의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비판은 공격이 되고, 의견은 반역이 되며, 다른 시선은 “너는 우리 편이 아니야”로 간주되죠.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이나 집단의 메시지는 모두 옳고, 그것에 반대하는 의견은 무조건 틀렸다고 여기는 현상입니다. 이는 곧 내가 속한 집단과 나의 사고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오히려 다양한 시각과 통찰력을 놓치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그들은 자신이 정답이라는 신념, 확신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틀릴 가능성조차 인정하지 않아요. 진실보다 중요한 건 ‘내가 믿고 싶은 이야기’가 되어버리니까요. 결국 이는 현실을 복합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을 저해하고, 편협한 세계관에 갇히게 만듭니다. 특히, 감정을 자극하고 편향된 시각을 부추기는 맹목적인 콘텐츠는 맹목적인 팬을 만듭니다. 특정 정당을 응원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정당이 하는 모든 일이 ‘옳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비판 없는 소비자, 아니 판단을 위임한 관객이 되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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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필요해지는 구조


몰입이 깊어지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에서 '반대편의 존재', 즉 적을 찾게 됩니다. 정치에서는 그게 다른 후보일 수도 있고, 그 후보를 지지하는 유권자일 수도 있어요. 사람들은 서서히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정의고, 저들은 악이다." 그렇게 정치는 선악 구도로 단순화되고, 비판은 곧 혐오로 바뀝니다.


스포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 지고 있다면, 사람들은 그 원인을 찾기 시작하죠. 처음엔 외부에서 찾습니다. 심판이 편파적이다, 일정이 불리하다, 상대 팀이 비열하다. 그런데 계속해서 성적이 좋지 않으면, 점점 내부로 적을 설정합니다. 가장 먼저 도마에 오르는 건 감독입니다. 전술이 잘못됐다, 운영이 답답하다. 심지어 어떤 팬들은 팀을 위해서라면 감독도 적이 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하죠.


그런데 감독만이 아닙니다. 특정 선수가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운동선수는 경기력의 사이클이 존재하는 직업입니다. 누구나 부진할 수 있고, 그 시기를 버텨야 합니다. 하지만 과몰입한 팬에게는 그런 여유가 없습니다. 성적이 곧 자존심이고, 오늘 경기의 결과가 내 감정의 바로미터가 되니까요. 그러다 보면, 한때 사랑했던 선수에게도 “왜 너만 못해?” “넌 더 이상 팀에 도움이 안 돼.” 같은 말이 쏟아집니다. 내가 응원하는 주인공이 성공하려면, 그 길을 막는 존재는 악역이 되어야 하니까요. 결국 그들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버리는 것이죠.


이 과정에서 우리는 점점 '이야기 바깥'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현실의 맥락이나 흐름이 아니라, 내가 만든 서사 속 구도로 모든 걸 해석하게 되니까요.




끝나지 않는 서사의 함정


드라마는 시즌이 끝나면 잠깐의 여운을 남긴 채 자연스럽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갑니다. 그제야 우리는 비로소 이야기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올 수 있죠. 스포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정규 시즌이 끝나면, 팬들은 ‘스토브 리그’라는 쉬어가는 시간을 맞이하죠.


그런데 정치라는 서사는, 그 쉬는 시간이 너무 짧거나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대선, 지방선거, 총선… 분명 선거 주기는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 사이사이를 메우는 건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논란과 갈등, 의혹과 이슈입니다. 무대는 잠시 쉬더라도, 무대 밖의 조명은 계속 켜져 있는 거죠. 그 틈을 타 정치인들은 새로운 적과 갈등 구도를 설정하고, 감정을 다시 끌어올립니다. 감정이 식기 전에 다시 불을 지피는 전략. 그렇게 우리는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를 반복해서 소비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선거는 끝났는데도, 진영 간 대립은 여전히 뜨겁고, 유튜브 알고리즘과 커뮤니티는 그 갈등을 재생산하며 감정을 붙잡아 둡니다. 누군가는 말합니다. “사람들이 원하니까 만드는 거라고.” 하지만 때로는, 사람들이 몰입하길 바라는 누군가가 감정을 설계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정치인의 언행은 곧바로 클립으로 편집되고, 방송사는 자극적인 자막으로 감정을 부추기며, 유튜브 알고리즘은 내게 ‘화낼 거리’를 계속해서 추천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선택하지 않아도 감정에 휘말리도록 유도되는 구조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구조에서는 감정을 식힐 여유도, 거리를 둘 틈도 사라집니다. 우리는 점점 정치나 스포츠가 아니라, 감정 자체에 중독되기도 합니다. 분노, 열정, 소속감, 우월감… 이 모든 감정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서사 구조 속에서, 우리는 어느 순간 그 서사의 일부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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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용기


우리는 모두 드라마를 좋아합니다. 마음을 쏟고, 울고, 웃고, 누군가를 응원하고… 그 모든 감정들이 이야기를 살아 있게 하죠. 정치도, 스포츠도 그런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드라마는 끝이 있고, 엔딩 크레딧이 흐릅니다. 우리는 극장을 나서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죠.


정치와 스포츠는 다릅니다.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감정도 멈추지 않죠. 언론은 매일 새로운 클립을 만들어내고, 누군가는 그 감정의 불씨를 다시 지피며, 우리는 다시 분노하고, 다시 몰입합니다.


물론 우리는 끝없이 감정을 부추기는 시스템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드라마에 끝이 있고, 엔딩 크레딧이 흐르듯, 이 현실 속 드라마에서도 스스로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를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언제 이 이야기를 ‘끄고 나올 수 있느냐’, 그 질문이 지금 중요해졌습니다.


내가 지지하는 팀, 내가 응원하는 인물을 사랑하는 건 너무도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그 감정이 내 하루를 지배하고, 누군가를 향한 혐오로 번지고, 내 세계를 점점 좁혀간다면, 그건 더 이상 즐거운 이야기가 아니겠죠.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멈춰야 합니다. 단순히 멈추는 것을 넘어, 다양한 언론 및 의견을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언론사든 유튜버든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 특정 세력을 지지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감안해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현상에 대해서는 양쪽의 의견을 모두 들어볼 용의를 언제든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영화나 드라마처럼 그저 바라보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무조건 수용하고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우리가 지지하는 누군가가 더 발전할 수 있도록 건설적인 의견을 내고, 이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반대 의견을 불편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시각을 통해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발견하고 함께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로 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드라마를 잠시 꺼두고, 관객석에 앉아 조용히 지켜볼 수 있는 용기. 나는 이 이야기에서 언제든 빠져나올 수 있다는 자율성. 그것이 우리가 이 끝나지 않는 드라마 속에서도 나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요?


* 참고 자료 : https://m.journalist.or.kr/m/m_article.html?no=56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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