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상영관을 넘어 '경험의 공간'으로
최근 많은 사람들이 "요즘 영화를 잘 안 봐"거나 "영화관에 갈 필요가 없어"라고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국내뿐 아니라 할리우드 등 전 세계적으로 극장 관객 수가 감소하는 추세는 명확합니다. 2023년 한국 영화 관객 수는 약 1억 2,500만 명, 2024년 1억 2,300만 명으로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인 2019년 2억 2,700만 명과 비교하면 절반 수준입니다. 이러한 현상의 주된 원인으로 흔히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플랫폼의 확장이 지목되곤 합니다. 과연 영화관의 위기는 오롯이 OTT 때문일까요? 그리고 영화관은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고 생존해 나갈 수 있을까요?
OTT 서비스가 영화 관람 방식에 미친 영향은 지대합니다. 가장 큰 요인은 단연 편의성입니다. 집이라는 익숙하고 편안한 공간에서 언제든 원하는 영화를 시청할 수 있다는 점은 극장 방문의 번거로움을 압도합니다. 집에서 영화를 본다는 건 때론 100% 집중하기보다는 '배경음악'처럼 흘려보낼 수도 있는, 낮은 시청 문턱을 형성하죠.
이러한 편의성과 더불어 콘텐츠의 압도적인 다양성도 OTT의 강력한 무기입니다. 월 2만 원이 채 안 되는 가격으로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다큐멘터리를 무제한으로 즐길 수 있다는 점은 강력한 가성비로 작용합니다. 여기에 넷플릭스 등 OTT 플랫폼이 자체 제작 콘텐츠의 하이라이트 클립, 배우 예능 등을 활용한 활발한 마케팅을 펼치며 대중에게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존재감을 각인시킵니다. 콘텐츠 제작자 입장에서도 글로벌 홍보 및 배급이 용이한 OTT는 매력적인 플랫폼이 되어, 마치 '가구 단지'처럼 콘텐츠가 모여 시너지를 내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하지만 영화관의 위기가 OTT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현대 사회의 다양해진 여가 활동과 문화 향유 방식의 변화 역시 큰 영향을 미치고 있죠.
과거에는 영화관이 가장 즐기기 좋고 문턱이 낮은 문화생활이었습니다. 합리적인 티켓 가격 또한 극장이 대중적인 여가 공간으로 자리 잡는 데 한몫했죠. 데이트 필수 코스에 '밥-카페-영화'가 포함될 정도였죠. 그러나 이제는 즐길 거리가 무궁무진합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잠시 주춤했던 오프라인 활동에 대한 갈증이 폭발하면서, 스포츠 경기 관람, 공연, 팝업 스토어, 맛집 탐방 등 선택지가 대폭 늘어났습니다. 팬데믹은 역설적으로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경험'의 소중함을 깨닫게 했지만, 동시에 영화관이라는 특정 공간의 기능이 정지되면서 다른 대안적 여가 활동으로 눈을 돌리게 만든 계기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프로 스포츠 관중은 눈에 띄게 증가했습니다. 2024년 KBO리그는 사상 최초로 천만 관중을 돌파하며 흥행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야구장은 탁 트인 공간과 함께 먹고 마시며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며 강력한 대체재로 부상했습니다. 공연 시장 역시 팬데믹 이후 회복세를 넘어 역대급 호황을 누리고 있으며, 400석 이하 소극장 공연의 비중이 늘고 중규모 공연 회차가 증가하는 등 다양성이 확장되는 추세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사람들이 영화 자체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기보다는, 문화를 향유하는 방식이 변화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TV 등 제한된 플랫폼으로 인해 다수가 공통적인 문화를 즐겼다면, 스마트폰과 알고리즘의 발달로 이제는 개개인의 취향이 더욱 세분화되고 다양해진 '다품종 소량생산'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특히, '라이브 콘텐츠'가 주는 희소성과 비예측성은 영화와 차별화되는 강력한 매력입니다. 영화는 언제 보더라도 같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스포츠 경기나 라이브 공연, 스트리머 방송은 '지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현장감을 제공합니다. 이 예측 불가능성이 관객에게 더 큰 흥미와 몰입감을 선사하며, 라이브 콘텐츠의 경쟁력을 높이고 있습니다.
영화관은 많은 사람이 모여 하나의 콘텐츠를 같은 공간에서 관람하며 '함께 웃고 감정을 공유하는' 희열이라는 강력한 메리트를 가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장감'은 인터넷 스트리밍과 같은 라이브 중계를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포츠 및 e스포츠 경기의 중계는 현장 관객의 리액션을 전달하며 '나도 저 현장에 있고 싶다'는 갈망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곧 실제 현장 관객 증가로 이어지죠. 이런 상황에서 영화관은 집에 있는 사람들을 현장으로 불러올 만한 '메리트'가 부족하다는 한계에 부딪힙니다.
결정적으로, 영화관은 '콘텐츠 제작자'가 아닌 '판매책'에 불과하다는 구조적인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야구를 비롯한 스포츠, e스포츠, 라이브 스트리밍 행사를 주관하는 회사나 단체는 본인들이 직접 라이브 스트리밍까지 진행하며 콘텐츠 제작과 배급을 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관은 그렇지 못하죠. 좋은 영화가 개봉해야만 관객 방문을 유도할 수 있는, 영화 제작사에 종속된 유통 채널인 셈입니다.
영화 제작사 입장에서는 극장 흥행을 통해 무한한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관객 수에 따라 수익이 들쭉날쭉하여 안정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반면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 플랫폼은 콘텐츠 구매 비용을 지불하는 형태이기에 수익이 한정적일지라도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합니다. 또한, 극장 개봉 후 짧은 시일 내에 OTT에 판매할수록 더 많은 비용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흥행이 완벽하게 보장되지 않는 영화의 제작사들은 극장 개봉 후 빠르게 OTT로 넘기는 것을 선호하게 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영화관의 가장 큰 경쟁자는 이제 OTT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영화관은 이제 단순히 영화를 상영하는 '콘텐츠 플랫폼'이 아니라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공간'으로서 다른 문화 시설들과 경쟁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영화관은 과감한 변화를 시도해야 합니다.
이미 일부 영화관들은 이러한 변화를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과거 대한극장의 한 상영관이 'WDG e스포츠 스튜디오'로 리모델링되어 오버워치 등 e스포츠 경기의 전용 경기장으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홍익대학교 인근으로 이전). 이처럼 상영관을 스포츠 체험 공간(클라이밍 짐, 골프 스튜디오)으로 개조하거나, 4DX, IMAX, ScreenX, Dolby Cinema 등과 같은 몰입형 특별관을 확대하여 '집에서 느낄 수 없는' 차별화된 경험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한, GV(관객과의 대화), 인플루언서 팬미팅, 영화 홍보 공연, 강연 등 '비(非) 영화' 콘텐츠를 유치하며 공간 활용의 다변화를 꾀하고 있죠.
하지만 이러한 시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영화관이 '경험의 공간'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다음 전략에 집중해야 합니다.
'오프라인 행사 부처' 신설 및 강화: 현재 영화관들은 영화 콘텐츠 유치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제는 기업이나 인플루언서, 출판사 등 외부 주체들의 오프라인 행사를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지원하는 전담 부서가 필요합니다. 단순히 공간을 대여해 주는 것을 넘어, 잠재 고객을 발굴하고, 그들의 니즈에 맞는 맞춤형 제안을 하며, 행사 기획 및 모객까지 지원하는 '오프라인 이벤트 솔루션 제공자'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문화 콘텐츠 연계 행사 집중: 영화관의 핵심 자산인 대형 스크린과 고품질 음향 설비를 활용할 수 있는 행사에 우선적으로 집중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기업의 고객 초청 행사에 영화 상영을 결합하거나, 출판사의 신간 북토크 및 팬사인회를 연계하여 진행하는 방식입니다. 실제로 한 건물 내 서점과 극장이 있는 경우, 서점에서 팬사인회 후 극장에서 북토크를 진행하는 성공적인 사례가 있습니다. MCN과의 협력도 매우 중요합니다. 인플루언서 팬미팅 현장을 유튜브 콘텐츠로 제작하여 확산시키는 방식은 영화관 공간의 다양한 활용 가능성을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강력한 홍보 수단입니다. 이러한 연계는 참석자들에게 특별하고 편리한 경험을 제공하며, '영화관에서도 이런 행사를 하는구나'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습니다.
성공 레퍼런스 확보 및 홍보: 위와 같은 성공적인 '비(非) 영화' 행사 레퍼런스들을 최대한 많이 쌓고 적극적으로 알려야 합니다. 이는 다른 잠재 고객들에게 '우리도 영화관에서 이런 행사를 해볼까?'라는 영감을 주며, 영화관이 '다양한 문화 행사가 가능한 특별한 공간'이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입니다.
이전까지 영화와 극장은 콘텐츠를 중심으로 한 공생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녹록지 않습니다. 콘텐츠 제작사들은 OTT라는 새로운 활로를 통해 영화와 드라마 제작을 넘어 CF나 유튜브 콘텐츠 등 영상 제작 전반으로 사업 영역을 다각화하며 독자적인 생존 방법을 찾아나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극장은 어떤가요? 극장 역시 더 이상 영화라는 단일 콘텐츠에만 의존해서는 안 될 때입니다. 대형 스크린이 주는 압도적인 몰입감, 고품질 음향이 선사하는 생생함, 그리고 수십, 수백 명이 함께 한 공간에서 감정을 공유하는 '집단 관람'의 특별함은 OTT나 다른 매체가 줄 수 없는 영화관 고유의 강력한 가치입니다. 특히 4DX나 IMAX 같은 기술은 단순히 영화를 보는 것을 넘어 콘텐츠를 온몸으로 경험하게 하는 몰입형 체험을 제공하며, 이는 비(非) 영화 콘텐츠와 결합했을 때도 큰 시너지를 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본질적인 강점을 바탕으로, 영화관은 이제 이야기와 경험을 전달하는 '플랫폼'의 경계를 확장해야 합니다. K-POP 아이돌의 컴백 쇼케이스, 베스트셀러 작가의 대규모 북 콘서트, e스포츠 결승전 중계, 혹은 다큐멘터리 감독과의 심층 대화 등 다양한 '라이브' 문화 콘텐츠를 담아내는 공간으로 진화하는 것이죠.
영화관의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사업 전환이 아닙니다. 영화관이 오랜 시간 쌓아온 기술력과 공간적 강점을 기반으로, 새로운 문화 소비 트렌드와 관객의 니즈를 적극적으로 포용하며 그 역할을 확장하는 '진화'의 과정입니다. 영화관은 이처럼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며, 앞으로도 우리 삶 속에서 잊을 수 없는 '경험'과 '추억'을 선사하는 특별한 공간으로 계속해서 존재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