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락한 극장의 가치
약 10년 전, 극장이라는 공간은 단순한 영화 상영관을 넘어 그 자체로 낭만과 추억이 서린 곳이었습니다. 실제로 2015년부터 2019년까지 5년 연속 연간 관객 수가 2억 명을 넘기며 천만 관객 돌파는 흔했고, 동시에 개봉한 두 편의 영화가 나란히 1,000만 관객을 넘기기도 했습니다. 특히 무더운 여름은 극장가 최고의 성수기였으며, 이 시기(7~8월) 관객은 매년 연간 관객의 20% 이상을 차지했습니다. 매년 “올해는 어떤 영화가 천만을 찍을까”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여름을 보내는 작은 즐거움이었습니다. 당시 배급사들은 가장 자신 있는 영화, 이른바 '텐트폴' 영화의 개봉 시기를 두고 치열한 눈치 싸움을 벌이곤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극장의 모습은 그 영광과는 거리가 멉니다. 여전히 영화를 보러 오는 사람은 있지만, 과거의 북적거림과 활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렇다면 극장 관객 수는 왜 이렇게 줄었을까요? 대다수 대중이 꼽는 가장 큰 이유는 티켓 가격 상승입니다. 10년 전(2014년) 최저 임금은 약 5,210원이었고, 당시 영화 티켓 가격은 8,500원 내외였습니다.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약 1.6시간을 일해야 했죠. 반면 2025년 기준 최저 임금은 10,030원이고, 티켓 가격은 14,000원 내외로,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필요한 노동 시간은 약 1.4시간으로 오히려 줄어들었습니다. 이처럼 최저 임금 상승률과 비교하면 비슷한 수준이라는 반론도 있지만, 집에서 훨씬 저렴하게 다양한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OTT의 등장으로 영화에 지불하는 비용이 상대적으로 비싸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 여러 원인 중 하나일 뿐이라고 단언합니다. 극장 하락세의 가장 큰 원인은 '극장이라는 공간의 가치 변화'에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극장이 가진 영화 외적인 가치에 큰 차이가 생긴 것입니다. 굳이 극장이 아니더라도 비슷한, 어쩌면 그 이상의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과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극장이 잃어버린 네 가지 가치
극장계가 잃어버린 가치들을 살펴보면, 여름 성수기라는 계절적 특수성부터 시작해 더 근본적인 변화까지, 복합적인 원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첫 번째 가치, '시원함'을 잃다
과거 극장은 무더운 여름, 더위를 피해 떠나는 피서지나 다름없었습니다. 휴가를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시원함을 찾아 모여들던 곳이 바로 극장이었죠. 실제로 2015년 여름에는 약 5,300만 명의 관객이 극장을 찾았을 정도로 그러한 상황들이 여름방학과 맞물리면서 여름 성수기라는 시즌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며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로 인해 가정용 에어컨 보급이 급증했습니다. 여기에 에너지 절약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더해지면서, 극장 역시 과도한 냉방보다는 적정한 온도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극장=시원한 곳'이라는 공식은 사라졌습니다. 시원함을 위해 굳이 극장을 찾을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오히려 에어컨 성능이 좋아지면서 전기세 부담이 줄자 집에서 편안하게 에어컨을 트는 가정이 많아졌고, 극장 외에도 시원한 공간이 얼마든지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습니다.
2. 두 번째 가치, '사회적 공간'을 잃다
과거 '밥-카페-영화'는 데이트나 친구 모임의 가장 보편적인 공식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러 가는 행위는 그 자체로 여럿이 함께 즐기는 공동체적 경험이었죠. 하지만 이제는 모여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너무나도 많아졌습니다. 영화관은 팝업 스토어나 보드게임 카페, 방탈출, 파티룸 등 능동적인 상호작용을 제공하는 새로운 공간들과 경쟁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영화 상영 중에는 대화나 상호작용이 불가능하다는 극장의 단점이, '실시간으로 소통하며 반응'할 수 있는 다른 공간들의 장점에 비해 부각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수동적으로 스크린을 바라보는 영화관은 '지루한' 선택지로 여겨지기 시작했고, 과거 '밥-카페-영화'의 무난한 공식은 능동적인 상호작용을 제공하는 새로운 공간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었습니다. 이처럼 극장이라는 공간의 밸류가 낮아지면서, 관객들은 극장을 찾는 것 자체가 아닌 '영화 자체의 중요성'에 더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3. 세 번째 가치, '독보적 경험'을 잃다
그렇다면 극장은 영화 그 자체의 힘으로 관객을 유인할 수 있을까요? 이 지점이야말로 극장 산업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입니다. 과거에는 집에서 극장과 같은 압도적인 시청각 경험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작은 TV 화면과 2.1 채널 스피커가 고작이었죠.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OTT 서비스가 4K, 돌비 비전 등 고품질 콘텐츠를 제공하기 시작하면서, 이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고 자연스럽게 고화질 TV와 사운드바의 보급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관객들의 영화 소비 방식을 극명하게 갈라놓았습니다. 이제 관객들은 '이 영화가 과연 비싼 돈과 시간을 지불하고 극장에서 볼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어중간한 퀄리티의 영화는 극장에서 외면받고 곧바로 OTT로 직행하는 것이 보편화되었습니다. 반면, 압도적인 시청각 경험을 약속하는 블록버스터나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은 작품은 여전히 극장을 통해 소비됩니다.
4. 네 번째 가치, '여름휴가'의 독점을 잃다
과거에는 피서를 위해 여름에만 휴가를 가는 것이 보편적이었습니다. 학교 방학과 직장인의 여름휴가가 겹치면서, 극장가 여름 성수기 흥행을 이끄는 중요한 동력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연차 제도가 잘 정착되어 개인이 원하는 시점에 자유롭게 쉬는 문화가 확산되었습니다. 굳이 여름에만 길게 휴가를 갈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데이터로도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2019년 22.0%였던 여름 성수기 관객 비중은, 2024년에 이르러 19.3%로 10년 내 최저치를 기록했습니다. 여름 성수기라는 계절적 특수성은 점차 희미해지고, 관객들은 '지금이 여름이니까 영화를 보자'가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 영화가 있을 때 극장에 간다'는 주의로 바뀌었습니다.
극장, 이제는 '대체 불가능한 경험'을 제공하라 결론적으로, 극장은 극장만이 줄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해야만 합니다. 아무리 극장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하더라도, IMAX, 4DX, ScreenX 등 일반 가정에서 체험하기 어려운 상영 포맷이나 돌비 시네마를 포함한 사운드 특화관과 같이 압도적인 기술력을 갖춘 상영관이 선택을 받는 것이죠. 영화 또한 그런 특별관의 경험을 극대화해 줄 수 있는 작품의 선호가 높아졌습니다. 실제로 <F-1 더 무비>가 개봉 한 달이 지났음에도 4DX관에서 높은 점유율을 보여주는 것이 그 예시입니다. 따라서 극장은 상영의 경험 자체를 이벤트 화하고, 영화 외적인 부가가치를 창출해야만 합니다. 영화와 함께 식사를 즐기는 '씨네 드 셰프'나 프라이빗 상영관처럼 관람을 특별한 이벤트로 만드는 공간적 가치부터, 감독과의 대화(GV)나 싱어롱 상영회처럼 극장만의 커뮤니티적 경험을 제공하는 방식이 바로 그 예입니다. 이런 글을 쓰면서 저도 저 스스로에 대해서 생각을 해봅니다. '이런 시대에 영화 크리에이터는 어떻게 변화해야 할까요?' 저도 그 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