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오>가 전하는 진짜 위로
제가 생각하는 픽사의 가장 큰 장점은 감정을 다룸에 있어서 섬세하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감정에 도달하기까지 그 단계가 매우 자연스럽고, 캐릭터의 표정이나 행동들이 디테일하게 그 감정을 보여주죠. 다시 말해, 픽사는 사건 자체를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다는, 그 사건을 겪으면서 인물에게 발생하는 감정 변화에 집중합니다. 그렇기에 영화 '엘리오', 그리고 픽사라는 스튜디오가 가진 감정 표현의 장점이 관객들에게 깊은 공감과 몰입을 선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가 영화를 보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몰입을 위한 것이기도 하고요.
영화 '엘리오'의 이야기는 애니메이션이기에 가능한 상상력으로 가득합니다. 어쩌면 허무맹랑하게 들릴 수도 있죠. 부모를 잃고 학교생활에도 잘 적응하지 못하며, 자신을 보호하는 이모와도 관계가 좋지 않은 아이. 엘리오는 자신이 이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새로운 곳, 바로 외계인들의 세계로 도피하려 합니다. 이건 아이가 가진 도피의 욕구를 극화한 것으로,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나는 있겠다'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 개념은 아동 심리학을 넘어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조직에 소속감을 느끼려면, 그 안에서 나라는 존재가 **'쓸모 있는 존재'**로 느껴져야만 하죠. 여기서 '쓸모 있음'은 저의 고유한 능력만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남들과 비슷한 업무를 하더라도, 제가 그 조직 유지를 위해 어느 정도 기여하고 있다는 **'기여감'**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무언가입니다. 그래서 사회에서 인간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말 중 하나가 '넌 쓸모없는 인간이야'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는 인간에게는 더더욱 크게 다가올 말이죠.
이는 아이에게도 비슷하게 적용됩니다. 가정에서 아이가 가족이라는 소속감을 느끼게 하려면, 그 아이에게 어떤 **'역할'**이 주어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현관의 신발 정리 같은 사소한 역할이라도 말이죠. 그리고 그 역할의 중요도, 그리고 아이가 그 역할을 잘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는 적절한 피드백, 즉 칭찬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엘리오' 속 이모처럼, 우리는 자신의 부하 직원이나 아이가 어떤 일을 하고 있고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을 겁니다. 물론 '관심'이 있다는 전제하에 말이죠. 하지만 그것을 표현하지 않는다면, 상대는 자신에게 관심이 전혀 없다고 느껴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다른 어딘가로 떠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간이 그 소속감을 확인하고 싶어서 '퇴사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거나, 연인에게 '자기야 나 사랑해?'라고 되묻는 것 또한 같은 맥락입니다. '대리님 아니면 그 업무 아무나 못해요'라는 말이 비록 입에 발린 소리라도 듣고 싶은 것일 수 있고,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죠. 물론, 애초에 이런 질문이 나오지 않도록 평소 행동에서 잘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이어가면, 엘리오는 이전까지 부모로부터 사랑받는 아이로 성장해 왔습니다. 어쩌면 인생의 전부였을 겁니다. 그렇기에 인생의 많은 부분을 잃고 느껴진 허망함을 채워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이죠. 자신의 보호자인 이모는 일 때문에 바쁘고, 친구들은 자신과 놀기보다는 놀리기에 바빴습니다. 그런 엘리오에게 지구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충분히 들었을 것입니다.
엘리오가 커뮤니티버스에서 겪게 되는 일들은 아마 엘리오가 상상했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상상 속 세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보이는 모습으로 판단하지 않고, 저의 말을 온전히 다 받아들이는 세계인 것이죠. 그래서 '어.. 지구'라는 대답에 '어 지구'라는 행성의 대표라고 인식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곳에서는 지구 대표라는 타이틀이 주어지죠. 엘리오에게 어떠한 역할이 부여된 순간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엘리오를 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또다시 버려지는 것이 싫었던 엘리오는 회원이 되기 위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기로 합니다. 그렇게 그라이곤과 마주한 그는 자식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라이곤과 부모의 고충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죠. 이는 엘리오가 부모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는 첫 순간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겉모습이 아닌 그 내면을 들여다보는 누군가가 있다는 이야기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존재가 바로 부모라는 것이죠. 그라이곤은 클론 글로든이 순순히 갑옷을 입는 모습을 보고, 그가 진짜 글로든이 아님을 의심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올가 또한 엘리오가 순순히 자신의 말을 듣는 모습을 보고 그를 의심했죠. 겉으로 보이는 사이좋음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따라 하려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겉으로 행복해 보이는 것이 그들이 진짜 행복한 사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죠. 즉, 보이는 것이 아닌 그 내면의 관계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클론 엘리오가 안대가 쓰인 눈은 복제하지 못한 장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엘리오 입장에서는 이모인 올가가 자신의 부모처럼 보살피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올가 또한 가족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말처럼 그녀가 상상했던 순간이 절대 아닌 것이죠. 그렇다고 그것이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형태만 다를 뿐이죠. 결국 적응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고, 겉으로는 아닌 것 같아도 올가 또한 엘리오와 잘 지내기 위한 노력을 했고, 그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엘리오가 느끼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죠.
'저의 부모는 저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을 겁니다. 물론 진짜로 그런 분들도 계시겠죠. 하지만 대다수의 부모는 자신의 자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랜 시간 성장을 지켜봐 왔기에 더더욱 애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죠. 하지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자녀가 성장하면서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 달라질 수밖에 없고, 더욱 배려한다는 생각이 들면 이전보다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러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 사랑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을 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어쩌면 요즘 젊은 세대는 그 어려움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섣부른 결혼과 출산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제가 제 아이에게 확실하게 사랑을 줄 수 있을 때가 되면, 그때 아이를 가지고 싶은 마음일 겁니다. 그렇다는 것은 그들의 어린 시절에 겪은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서, 자녀와의 시간을 포기하고, 방법을 알기에 어려웠던 시대적 배경도 있었을 겁니다.
결과적으로 '엘리오'는 그런 부모와 자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올가와 엘리오가 이모와 조카 관계인 것은 이전과 달리 다양해진 가족의 형태를 반영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죠. 꼭 자신의 자녀가 아니더라도 부모 관계는 성립할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담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더불어 지구와 전혀 다른 생김새와 언어,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까지 보여줍니다.
올가와 그라이곤이 가짜 자녀를 통해 진짜 가족의 의미를 되새겼듯이, 엘리오 또한 외계 세계에서의 경험을 통해 자신이 진정으로 있어야 할 곳은 다름 아닌 지구와 자신의 가족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는 더 이상 도피처를 찾는 아이가 아닌, 자신의 자리를 찾아 나가는 존재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죠. 외계인들의 세계에서 단순히 '지구 대표'라는 역할을 맡는 것을 넘어, 엘리오가 자신이 가진 진정한 재능과 본연의 모습을 통해 그곳에서, 그리고 지구에서 '쓸모 있음'을 증명하는 과정은 인상 깊습니다. 이는 그가 스스로의 가치를 인정받고, 진정한 소속감을 찾는 여정이 됩니다.
이 영화는 아이들이 보면서 이해하기에는 연륜이 조금 필요한 내용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 만큼 자녀의 성장을 지켜봐 온, 혹은 그 성장한 자녀가 보기에 더 많은 생각이 들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결국 '엘리오'는 잃어버린 소속감을 찾아 헤매는 모든 이들에게, 진정한 나 자신을 발견하고 사랑하는 곳에 소속감이 있다는 따뜻한 위로를 전합니다. 이 영화는 단순히 상상력을 자극하는 애니메이션을 넘어, 깊이 있는 인간 심리와 관계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하는 분들께 큰 울림과 따뜻한 위로를 선사할 것입니다. 특히 가족과의 소통에 어려움을 느끼거나,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 있는 분들이라면 '엘리오'를 통해 큰 공감과 위로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