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과 'F1 더 무비'를 보고
이 글은 이전에 올린 '우리가 주인공이 되고 싶은 이야기'의 풀버전입니다.
처음에는 이 글을 그대로 올리려고 했지만,
감정이 너무 많아 정제된 버전에서는 많은 부분을 덜어냈습니다
하지만 쓰다 보니, 그 감정과 야야기들이
그냥 흘려보내기엔 아쉬워졌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솔직한,
그리고 솔직해서 정리가 덜 된 원고를
이렇게 따로 올리게 되었습니다.
정제된 요약을 원하시는 분들은
위 링크를 통해서 '정제본'으로 먼저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지금,
긴 글을 읽은 준비가 되셨다면
이야기를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최근 제가 접한 두 콘텐츠, 전 세계를 강타했던 드라마 '오징어 게임'과 '낭만은 쓸모없는 것에서 온다'는 깊은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 'F1 더 무비'. 겉모습은 달라도, 이 두 작품은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떤 가치를 좇으며 살아가고 있는가?
두 작품에는 하나의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승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 [데블스 플랜]과 영화 [승부]를 통해서도 승부에서 대해서 언급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징어 게임'의 성기훈과 'F1 더 무비'의 소니, 이 두 주인공이 승부를 대하는 태도에서 극명한 차이가 발생합니다. 성기훈은 자신의 선한 의도로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을 모두 살리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승부에서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죠. 반면 'F1 더 무비'의 소니는 여러 레이싱 대회를 석권하려는 인물입니다. 흥미롭게도 이들에게는 또 다른 공통점도 있는데, 바로 '상금'에는 큰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두 콘텐츠에 대한 반응은 전혀 다르게 나타나죠.
'오징어 게임' 시즌 3를 보면서, 황동혁 감독이 이전 인터뷰에서 직접 언급했던 "돈을 벌기 위함이다"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의 솔직한 답변은 개인적으로 의아했습니다. 마치 면접에서 '그냥 돈 벌려고요'라고 답하는 순간처럼, 고개가 갸웃해지는 대목이었습니다. 물론 속으로는 모두가 돈을 원할 것입니다. 하지만 면접관이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단순히 돈을 넘어선 선택의 이유와 목적을 듣고 싶어서입니다. 왜 많은 회사 중 이곳인지, 왜 이 직업을 택했는지 말이죠.
이를 콘텐츠 제작자에게 대입해보면,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서 이 직업을 선택한 것이고, 그 과정에서 돈을 버는 것이 당연한 흐름일 겁니다. 그렇다면 황동혁 감독에게 '돈을 벌기 위해서'라는 대답은 너무나 당연하고도 본질적인 대답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콘텐츠를 소비하는 대중에게는 적어도 시즌 2를 제작할 또 다른 이유가 필요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령 "시즌 1을 사랑해주신 분들께 보답하고 싶은 마음과, 미처 다 풀지 못했던 아이디어를 보여드리고자 한다"는 식의 메시지 말입니다. 감독의 ‘돈’이 우선된다는 발언은 대놓고 ‘월급 루팡’을 하겠다는 직장인의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속으로는 모두 그런 생각을 하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고, 적어도 자신의 역할에는 최선을 다하려고 하는 대부분의 직장인들을 생각하면, 정제되지 않은 발언이었다고 생각하고, 의도가 그렇지 않더라도 작품의 평가에도 영향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영화 <남한산성>부터 <오징어 게임> 시즌 1까지, 황동혁 감독의 '새로운 시도'에 대한 긍정적인 신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위 인터뷰 이후의 행보, 그리고 시즌 2와 3를 보면서는 큰 실망감을 느꼈습니다. 무엇보다 이야기를 억지로 끌고 가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이렇게 길게 끌 이야기가 아닌데, 하나의 타임라인에 여러 에피소드를 동시에 올리려다 보니 한 에피소드가 진행되다가 끊기고, 같은 시간에 벌어지는 다른 에피소드가 나오는 패턴이 너무 자주 반복되어 흐름이 끊겼습니다. 이는 기술적으로도 아쉬운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제대한 지 얼마 남지 않은 병장이 대충 얼버무리며 시간을 보내는 듯한 인상이었습니다. 자본주의의 차가운 시선을 담아냈던 콘텐츠가, 오히려 자본주의에 굴복한 듯한 감독의 모습을 보여주는 아이러니가 느껴졌습니다. 진짜 돈이 목적이라면 더 큰 돈을 벌기 위해서 더 열심히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저의 솔직한 생각입니다.
오징어 게임 속에서 답답했던 부분은 인물들의 행동들에 전혀 공감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 한 인물 정도에는 공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저는 공감되는 인물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공감이 되지 않는다면, 이해 혹은 납득이라도 가야 하는데 그것마저도 성공적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VIP 이야기, 남수, 노을 이야기는 빼도 이야기 전개에 전혀 영향이 없을 뿐더러, 영화의 메시지에도 크게 영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각 파트에 있는 인물들이 무엇을 위해서 존재했는지가 의문입니다.
물론 감독은 각 인물들을 통해서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여러 이야기들을 '오징어 게임'이라는 하나의 사회 속에 녹여내고 싶었을 겁니다. 드라마 속에서 그런 메시지들을 담으려는 시도들이 분명 보였으니 말이죠. 하지만 그것만을 위해서 드라마의 재미와 개연성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일 겁니다. 온전히 집중하면서 보기에는 답답한 포인트가 너무 많다는 것이죠. 마지막 게임에서 명기와 기훈이 보여준 모습도 그렇고, 시즌 2의 가장 큰 떡밥으로 보인 대호의 해병대 이야기도 생각보다 허무한 결말을 보였으며, 무엇보다 주인공인 성기훈이 게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상황에서 드라마 속 게임이 전혀 의미가 없어지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거기에 게임이 진행되는 섬을 찾으려는 준호의 이야기도 지지부진했습니다.
정리하면, 이 드라마에는 '오징어 게임'이라는 큰 게임과 그 게임이 벌어지는 섬을 찾으려는 준호의 이야기라는 큰 틀이 있습니다. 여기에 VIP들, 프론트맨(오영일)과 성기훈, 부대장과 강노을, 박경석의 서사, 용식과 금자, 현주, 준희와 명기, 용궁 선녀, 남규와 민수, 그리고 그들 사이의 각자 다른 관계들이 같은 타임 라인에 올려져 있다는 것이 스토리 자체를 산만하게 만들어 몰입하기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감독의 솔직한 발언이 좋다는 의견도 있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용서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솔직함이라는 낭만을 밀어붙이고 싶었다면, 적어도 자본주의에 굴복하는 듯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돈을 받은 만큼 더 제대로 그 가치를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입금 전과 후가 다른 우리들처럼 말이죠.
어쩌면 그가 <오징어 게임>의 제작이나 고문 정도로만 참여하고, 본인의 새로운 작품을 제작하는 역제안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시즌 1으로 큰 성공을 거두며 그의 몸값이 상승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넷플릭스와의 계약 구조상 추가적인 흥행 수익은 없었겠지만, 다른 방식으로든 충분한 보상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내부 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난 모습만으로는 그의 행보가 아쉽게 느껴집니다.
'오징어 게임'이 차가운 현실의 단면을 비춘다면, 영화 'F1 더 무비'는 전혀 다른 메시지를 던집니다. 조셉 코신스키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를 보며 제가 가장 먼저 떠올린 문장은 "낭만은 쓸모없는 것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은 때론 낭만과는 거리가 멀죠. 그렇기에 낭만은 더욱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감독의 전작인 <탑건: 매버릭>이 보여준 것처럼 말이죠.
은퇴한 주인공이 다시 돌아와 현역으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여주는, 어찌 보면 영화의 흔한 클리셰일 수도 있습니다. 지루하고 뻔한 이야기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를 실제로 이뤄내면 우리는 그것을 '낭만'이라고 부릅니다.
영화는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납득 가능한 '그럴싸함'을 만들어내는 예술입니다. '현실적'이 아니라 '현실처럼' 보이게 만드는 힘. 바로 그 지점에서 'F1 더 무비'는 빛났습니다. 그런 시선에서 'F1 더 무비'는 참으로 많은 부분에서 공을 들였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레이싱의 맛보기를 보여준 뒤에 레이싱의 끝판왕인 F1으로 자연스럽게 접근시킵니다. 주인공 소니는 흔히 말하는 '도장 깨기'를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F1 더 무비'의 주인공은 '돈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듯이, 그저 레이싱이라는 것 자체가 재미있고, 자신이 이루지 못한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과정 그 자체에 몰두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우승이 아닌 팀의 우승, 더 나아가서는 후배인 조슈아의 우승을 밀어주려는 그의 모습에서 저는 진정으로 큰 낭만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에 대한 리스펙을 보내는 조슈아의 모습까지, 정말 낭만 넘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죠. 이러한 이야기는 미국 할리우드 영화의 큰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별것 아닌 스토리이기도 하고, 클리셰적인 부분이 가득하며, 실제 F1과 다른 부분도 있지만 이 모든 것을 '낭만 있는 영화'라는 것으로 포장이 가능하다는 것이 이 영화의 장점입니다. 결국 (조만간 업로드 예정인 '케데헌' 리뷰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다룰 예정입니다.)
F1을 다룸에 있어서 허투루 다루지 않고, 승부에 진심인 캐릭터처럼 감독과 제작진 또한 F1의 속도감과 긴박함, 승부의 매력을 관객들에게 선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그 가치를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약간 여담이지만, 애플 TV에서 제작한 영화들이 이러한 경향이 짙은 것 같습니다. 미국의 영화들이 대체로 그런 편이긴 하지만, 애플 TV 또한 '편하게 볼 수 있는 퀄리티 높은 영화'를 표방하며, 독특한 스토리 라인보다는 무난한 스토리에 캐릭터 및 배경 등에 투자를 해서 볼만한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애플TV에서도 '세브런스'와 같은 신선한 스토리의 드라마도 있고, <플라워 킬링 문> 같은 작품성 짙은 영화도 있지만, 이것은 플래그십 같은 느낌이고 대체로 그렇다는 거죠. 아무래도 자사 OTT 공개를 염두에 둔 만큼, 손이 쉽게 가는 영화를 지향하는 듯합니다.
결론: 내가 주인공이 되고 싶은 이야기, 거기엔 '희망'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이야기엔 들어가고 싶어 하고, 어떤 이야기엔 멀찍이서 구경만 합니다. '오징어 게임' 속 인물들을 보며 '나라도 저렇게 했을까'가 아니라, '나는 저기에 끼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더 먼저 들었습니다. 그건 제가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습니다. 'F1 더 무비'는 제가 타고 싶은 차고, '오징어 게임'은 제가 떨어지고 싶지 않은 낭떠러지였죠.
반면 'F1 더 무비'는 클리셰고 뻔하더라도, 제가 그 속에 들어간다면 괜찮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건 이 이야기가 저에게 주인공의 가능성을 열어줬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인공이 되고 싶은 이야기, 거기엔 반드시 '희망'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영화가 끝난 뒤에 F-1에 대한 관심이 생겨서 게임을 찾아보거나 영상을 찾아보게 되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영화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영화의 소재인 F-1의 매력을 잘 보여준 것이니 말이죠.
그래서 문득 생각해봤습니다.
우리는 늘 이야기를 봅니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는 '되고 싶은 이야기'고, 어떤 이야기는 '멀리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결국 우리가 반복해서 찾아보는 콘텐츠에는,
'내가 그 안에서 살아보고 싶은 세계'가 담겨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