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모순

사진: Unsplash의Jon Tyson

by 따독맘


"일단 멈춰보자."


이 단순하고 소박했던 다짐이 '육아휴직이 허락하는 그 날까지 꽉 채워 1년을 살아보자!'는 거대한 프로젝트로 변경된 것이 엊그제 같다. 쉼 없이 달려온 지난 15년의 끝에 찾아온 발리 1년 살이. 이 결실을 코앞에 둔 나는 요즘, 극심한 자기 모순에 시달리고 있다.





그 놈의 가성비...


발리행을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엄마의 브레이크 없는 삶이 가족 모두의 피로로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복잡한 관계에 치이는 대신, '아이의 마음을 읽는 엄마'가 되어 그 순간순간을 함께하며 기억하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국제학교 등록까지 마치고 현지 정보를 뒤적이다 보니, 15년 차 워킹맘의 피에 흐르는 '가성비와 효율' DNA가 끓어오른다.


- "잠깐, 이 가격 실화야? 가성비 안 좋기로 유명한 수영인데, 발리에서는 1:1 레슨이 이 가격이라고?

- "주니어 테니스 아카데미가 있어?"

- "뭐야? 코딩 수업도 있었네?"


발리에서 국제학교를 다니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에게는 충분한 경험일 것이다. 하지만 '이왕 하는 거' 아이들의 몸과 마음 건강도 챙기자는 그럴듯한 명분을 덧붙여 미친 듯이 현지 수업을 찾아보고 있다. 분명 나는 '담백한 일상'을 꿈꿨는데, 지금 내 머릿속은 발리에서도 아이들 스케줄표를 '최대 효율'로 짜는 또 다른 '프로젝트'로 가득하다. 아이들의 마음을 읽어주겠다더니, 나는 발리에서도 '스케줄을 읽히는 엄마'가 되려는 건 아닐까? 쉼을 찾아 떠나는데, 왜 더 바빠지는 기분일까?





무소유의 삶을 꿈꾸지만, 짐은 이삿짐을 방불케


발리는 내향인인 나에게 '적당한 거리감'과 '고립된 자유로움'을 줄 안식처라고 믿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자. 자연 속에서 무소유의 삶을!" 외쳤건만, 출국 날짜가 다가올수록 내 안의 불안함은 짐 부피와 정비례한다.

결국 나는 '이삿짐을 방불케 하는 엄청난 짐싸기'를 실행하며 모순의 정점을 찍고 있다. '이건 꼭 필요할 것 같아서', '저건 현지에서 비쌀 것 같아서.' 갖은 핑계로 바리바리 싸는 이 모든 행위는 무소유와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1년이라는 쉼에 부응하기 위해 나도 뭐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언어 교환 파트너를 찾아 영어공부를 해야 하나? 발리는 요가의 성지이니 Yoga Training Teacher 자격증이라도 따야 할까? 쉼을 위해 멈췄는데, 또 다른 성과를 위해 달려야 할 것 같은 이 고통스러운 중독성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이럴거면 왜 휴직했니?


이번 육아휴직은 '내일 똑같이 반복될 하루가 무서웠던' 워킹맘의 삶을 잠시 접겠다는 통 큰 결정이었다. 이 버거운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을 절호의 기회다. 그런데도 마지막까지 미련을 놓지 못하고 질척이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인수인계를 완벽하게 처리하고, 15년 차 기획자로서 '뾰족하게' 살아남았던 그 공간을 미련 없이 떠나야 하는데... 혹시 내가 없으면 회사에 큰일이 생길까, 1년 뒤 돌아와서 나의 자리가 없어질까 하는 은밀한 불안감이 나를 마지막까지 일에 붙잡아 둔다. (막상 나 하나 없어도 회사는 문제없이 잘 돌아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가족을 책임지는 생존 방식'이었던 회사 생활. 나라는 기둥이 무너지면 안 된다는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의무감이 주는 중독은 생각보다 강하다. 미련 없이 떠나고 싶다 말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질척이는 나. 이것이 바로 쉼을 찾아 떠나는 40대 워킹맘의 현주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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