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학교 레드스쿨을 시작하며 창립멤버들은 학교 이름부터 모든 것을 기존의 학교 개념을 벗어나 새롭게 만들어보자 마음 먹었다.
학교 이름의 처음은 뉴스쿨 레드였다. 설립자의 취향이 빨강을 좋아하기도 했고 아이들의 내면에 불을 불러일으키겠다는 설립자의 강한 의지도 담겨있었던 듯 싶다. 그러나 그런 의미로 학교이름을 정할 수 없어서 레드에 약자로 의미를 만들어보았다.
Revolution, Enthusiasm, Desire
그래서 R.E.D. 레드스쿨이 된 것이다. 자신을 혁명하고 열정적으로 살며 꿈꾸는 것을 이루어나가는 평생학습인으로 성장시키자는 의미의 레드스쿨.
설립자의 그런 취지로 시작한 학교이니만큼 모든 것은 맹렬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이 단어들을 다시 들여다보니 청소년기 아이들에게 너무 강렬하고 버거운 단어였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사실 이 모든 것들을 다 동의하는 건 아니었지만 반대하지도 못했던 나를 항상 부끄러워했다. 그리고 좀더 안정된 학교가 되면 진정 본질에 가까운 꿈꾸는 교육의 현장으로 이곳을 만들어 가고 말겠다는 야무진 꿈을 마음에 품고 성실히 열심히 학교체계를 만들어갔다.
학교에는 이름탓인지 몰라도 뭔가 다시 시작하고자하는, 또는 다시 시작할 수 밖에 없는 아이들이 많이 찾아왔다. 스스로 변화하고 싶어(혁명까지는 아니겠지만) 온 아이들도 있었지만 부모님의 결단으로 시골의 기숙학교에 대안교육이 무언지도 모른채 끌려 왔다고 생각하면서 온 친구들도 있었다. 야생마같은 아이들이었다. 나는 이 아이들과 자연 속에서 성적에 얽매이는 수업이 아닌 감성을 키우고 삶의 지혜를 배우는 교육을 하고 싶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혼자 엉뚱한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들과 버텼다. 언젠가는 그런 수업을 할 수 있을 거라 믿으며..
하지만 개교 1년차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아이들은 새벽 5시반이면 스스로 기상해서 장대울길을 달려야 했다. 평일엔 국어수업과 중3 담임을, 주말엔 기숙사 사감을 해야했던 나는 주말엔 아이들과 새벽 달리기를 함께 했다. 서른 중반 경력 중단 여성으로 살던 나는 새롭게 시작한 이 일에 온몸을 던졌다. 운동이라곤 안하던 나였는데 그때는 그 깜깜한 밤에 아이들과 고무신을 신은 채로 어쩌면 그렇게 잘 달렸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할 뿐이다. 나는 그렇게 발톱이 빠지도록 달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설립자인 교장선생님은 점점더 훈련을 강조했다. 물론 틀 밖으로 쉽게 벗어나는 아이들의 일탈행동들이 수시로 발견되는 것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런 행동주의 교육이 점점 강화되면서 아이들은 스스로를 붕어빵 틀에서 찍혀 나오는 거같다, 자신의 삶은 없어지는 것 같다며 힘들어 했다.
설립자는 오랜세월 수련회에서 아프고 삶에 지친 사람들을 치유하고 다시 스스로 일어나 걷고 달리게 하는 의식변화 프로그램의 안내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셨고 그런 일을 해오셨다. 그래서 몇 천명의 사람을 만나며 인간변화에 대한 나름의 명확한 생각을 가지고 계셨고 그것을 우리 아이들에게 적용하려고 하셨다. 하지만 그것은 성인프로그램이었기에 나타날 수 있는 결과치였다. 교장선생님은 레드스쿨의 아이들이 청소년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계셨고 강력한 카리스마로 교사들의 의견이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 시절 교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상처받지 않으면서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가꿀 수 있도록 돕는 일, 내 수업 안에서 마음의 안정과 상상력을 마음껏 펼치며 행복한 경험을 많이 하도록 돕는 것 정도였다. 그 이외엔 시키는 일들을 해야 했다. 나도 모르게 그런 분위기에 길들여진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이런 상황을 마음에 혼자 가두고 입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레드스쿨 11년의 생활을 했다. 그래서 학교 밖 활동을 더 열심히 하고 공부를 하러도 다녔다. 하지만 어디서도 자랑스럽게 레드스쿨을 설명하지 못했다.
그저 학교설명회에서, 그리고 학교 아이들 앞에서만 레드스쿨을 그럴 듯 하게 잘 포장해서 홍보했지만 진정한 내 마음은 레드스쿨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부끄러웠다. 떠난다는 것도 무책임하게 느껴졌다. 2년 사이에 교감이 3번이나 바뀌었다. 2개월, 10개월, 1년만에 세 명의 교감이 학교를 떠났다. 그리고 세번째 교감이 다음 교감으로 나를 지목하는 바람에 나는 팔자에도 없는 교감(레드스쿨에서는 헤드코치라 불렀다)역할을 해야 했다. 반장 한번 해본 적 없던 내성적이고 개인주의적이던 내가 교감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1년차엔 모든 책임이 내게 몰려오는 것이 억울했다. 몰라서 아이들과 교사들을 불편하게도 만들고 학교 운영의 시행착오를 겪었다. 밤에 잠도 편히 자지 못했고 새벽 5시면 번쩍 눈이 뜨이며 바인더에 빼곡히 쓰인 일정들을 보고 또 보고 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그렇게 버텨낸 하루하루가 7년을 채웠다. 인간 이민경에게 가장 가혹했지만 가장 성장이 눈부셨던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교장이 부재한(교장선생님은 학교근무를 하지 않으셨고 일주일에 한번 정도만 학교를 시찰하시고 보고형식의 회의에 참석하셨다.) 학교에서의 교감의 역할은 할 수 있는 게 많았다. 교장선생님을 설득하고 일을 기획, 실행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대안교육학과 박사과정에 들어가서 이론적 무기도 더욱 탄탄히 만들고 대안학교 경험자 선배님들과 교수님들의 지지와 응원도 받으며 진정으로 내가 만들고 싶었던 학교를 하나씩 하나씩 개혁해 나가기 시작했다. 부끄럽지 않고 자랑스러운 학교 레드스쿨을 나는 진심으로 만들고 싶었고 교사들도 그러하기를 간절히 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