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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딸공 Aug 21. 2020

내 이름은 김딸공

[일일딸공] 엄마의 못 다한 이야기 (1)

 엄마는 서울 사람이었다. 1956년의 봄날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어느 동네에서 열 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고 했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엄마는 경기도 사람이었지만, 대구 토박이들이 그득한 우리 동네에서는 그냥 서울 사람으로 통했다. 동네 아줌마들과 다른 엄마의 세련된 말투가 나는 참 좋았다.       


 잠깐, 그런데 열 남매의 막내라고? 하도 어릴 때부터 들어 별 감흥이 없던 그 말이 어느 나이엔가 훅 버겁게 다가왔다. 열 남매라니! 머릿속으로 이모 외삼촌들을 아무리 세어 보아도 떠오르는 얼굴로는 열 남매가 완성되지 않았다.


엄마! 엄마는 열 남매라면서? 근데 나머지 이모랑 외삼촌들은 다 어디에 있어?     

외갓집 이야기만 나오면 머뭇거리던 엄마가 어느 날엔가 들려준 옛날 옛날 이야기.      


 엄마의 엄마, 그러니까 외할머니에게서 태어난 자식은 모두 여섯이었다. 딸-아들-아들-딸-아들-딸, 조화로운 삼남삼녀 가족의 막내딸이 우리 엄마였다고 한다. 삼남삼녀라면 어릴 적 읽던 전래동화 속 해피엔딩의 상징 아닌가? 내 기억이 맞다면, 춘향이와 이몽룡도 삼남삼녀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조화롭고 화목한 가정의 상징, 삼남삼녀. 그런데 엄마의 탄생으로 완성된 삼남삼녀는, 행복의 완성이 아니라 가난의 중첩이었던 모양이다.      


 막내 외삼촌과 엄마는 딸만 여덟인 집에 양자로 들어갔다. 필요한 건 아들이었지만, 아들만 오면 외로우니까 막내딸까지 덤으로 데려갔다고. 한 살 위 오라버니 밥도 챙기고 막내 노릇도 하며 귀염 받으라는 뜻이었다는데, 그게 대체 무슨 소린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렇게 엄마는 열 남매의 막내딸이 되었다.      


 다행히 새로 들어간 집의 어른들로부터 소설 속에 나올법한 학대는 없었다고 했다. 물론, 하루아침에 부잣집 막내딸이 되는 반전 또한, 없었다. 엄마는 아홉 살부터 가마솥에 불을 피워 아침밥을 하는 생활을 시작했고, 중학교까지 보내준 어른들에게 감사하는 어른으로 자랐다. 그 집의 어른, 특히 엄마의 새아버지는 꽤 유머러스한 분이어서, 두루마기와 갓 차림으로 툭툭 던지는 진지한 말이, 지나고 보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단다. 잠자리 이불속에서 혹은 여름밤 평상에서 모기를 쫓으며 나누었던 이야기를 들려줄 때, 엄마는 진짜 신나 보였다. 사실 엄마는, 어떤 순간에도 긍정하고 웃는 사람이었다.      


배가 부르면 기분이 너무 좋았는데, 너무 많이 먹어서 소화가 안 될 땐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더럭 겁이 나더라고. 그래서 아이고 배불러 죽을 거 같아! 했더니 아부지가 저기 평상에 가서 누우라고 하잖아. 그래서 평상에 올라가 누웠지. 근데 아부지가 저기 하늘을 올려다 보더니, 하느님! 배불러도 죽습니까? 하는 거야. 대답이 없으니 나보고도 해보래. 그래서 누운 채로, 배가 불러도 죽습니까? 하고 소리쳤지. 누워서 뒹굴면서 소리 몇 번 치니까 죽을 거 같던 배가 좀 꺼지던데? 니네 할아버지가 그렇게 실없는 소릴 잘하셨단다.      


 배불러 죽을 거 같다는 막내를 평상에 눕혀놓고 하늘에 소리치는 아버지라니, 이야기를 전하는 엄마의 눈에 원망 없이 온전한 그리움만 가득한 바람에, 오라버니 밥해주라고 데려갔단 걸 순간 이해해 줄 뻔했다. 은근 개그 욕심이 있었던 우리 엄마, 저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나? 싶던 순간, 뜻밖의 웃음으로 말랑해지던 공기가 고단했던 삶을 이겨낸 엄마의 방어기제였다는 걸 엄마의 나이에서야 어렴풋이 짐작한다.      


 그렇다고 한(恨)이라는 게 없었을까. 딸로 태어나 남의 집에 팔려가다시피 맡겨졌고, 딸로 태어나 가고 싶은 고등학교에 갈 수 없었다던 엄마. 딸로 태어난 게 늘 한이었다는 엄마는, 당신의 딸만큼은 차별없이 공주처럼 키우겠다 다짐한다. 세상 둘도 없는 공주처럼, 아들 딸 차별 없이 키워내고 말겠다고.


우리  공주, 우리  공주, 하다가 줄여서 부른 이름이 딸공. 그래서 나는, 딸공이 되었다.      



1986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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