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일딸공]
이번 주는 주요 대학 수시 원서접수 및 자소서 입력 기간입니다. 아이들의 자소서를 첨삭하다가, 나의 자소서를 써 보았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한 지 이십 년이 넘은 관계로 ‘고등학교 재학 기간’을 ‘대학교 졸업 후’로 바꿔서 작성한 건 비밀이고요, 자소서를 써보니 아이들이 왜 그렇게 쓰기 어려워 했는지 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이렇게 쓰면 합격할 수 있을까요?
1. 대학교 졸업 후, 학업에 기울인 노력과 학습 경험을 통해, 배우고 느낀 점을 중심으로 기술해 주시기 바랍니다. (띄어쓰기 포함 1,000자 이내)
대학교 졸업 후 수학교육과에 편입하였습니다.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에 교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고, 그 중에서 수학이라는 과목이 가장 친숙하니 수학 교사가 되면 적당하겠다는 쉬운 생각이었습니다. 고등학교까지 수학을 잘했고, 수능에서도 수학 과목은 만점을 받았기 때문에 대학 수학에도 어려움은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를 완전히 바꾸게 된 것은 첫 전공 수업이었습니다. 학사편입이었으므로 3학년 전공에 바로 합류했고, 첫 수업은 위상수학이었습니다.
흔히 위상수학이라 하면 도넛과 커피잔을 같은 것으로 분류하는 형태의 기하학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위상수학을 이해하기 위해 ‘공리계’라는 것을 정의해야 했고, 공리와 명제를 구분하여 증명하고 덧붙이는 과정으로 수 체계를 확장해나가야 했습니다. 단순히 조건에 따라 결정되는 모임이 집합인 줄 알았는데, 집합을 바탕으로 함수를 정의하고 집합족 위에 위상을 정의하는 과정을 이해하며 왜 집합을 현대수학의 기초라 불렀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이후 대학원 수업으로 대수적 위상수학을 배우면서 도넛이 커피잔과 같은 위상인 이유를 수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학교 시절 아르바이트로 여러 학생을 가르쳐왔는데 돌이켜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입니다. 학생들의 수업에 최선을 다했고, 다양한 문제를 풀어주었지만 제가 가르쳤던 것이 수학이었는지 문제 푸는 기술이었는지 자신이 없습니다. 그 당시 제가 알고 있던 수학은, ‘주어진 시간 내에 빠르고 정확하게 답을 찾는 기술’이었기 때문입니다. 수학은 정의와 공리를 바탕으로 명제를 쌓아가는 학문임을, 그리하여 이치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학문임을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배우고 느낀 수학의 아름다움을 학생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기술보다 원리를, 문제보다 개념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려고 노력합니다. 변별을 이유로 평가를 왜곡하지는 않았는지, 가르치기 쉽다는 이유로 수학의 본질을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늘 반성하고 경계합니다. 더 많은 학생들이 수학에 흥미를 느끼게 되기를 바랍니다.
2. 대학교 졸업 후 본인이 의미를 두고 노력했던 활동(3개 이내)를 통해 배우고 느낀 점을 중심으로 기술해 주시기 바랍니다. 단, 교외 활동 중 학교장의 허락을 받고 참여한 활동은 포함됩니다.(띄어쓰기 포함 1,500자 이내)
가장 오랜 시간 의미를 두고 노력한 활동은 글쓰기입니다. 미니홈피가 유행하던 대학교 때 가끔 글을 쓰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블로그를 마련해 글을 써나가기 시작한 것은 아이를 낳고 나서부터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아이는 대견했지만, 아이가 커가는 만큼 저의 존재는 흐려졌습니다. 분유와 기저귀의 선택에는 수없이 많은 이유와 단서를 붙이면서, 스스로를 위한 선택은 단출하게 끝내는 자신을 보며, 나의 목소리를 내고 싶어졌습니다. 블로그를 열고 자라는 아이의 모습 대신, 나의 생각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추억, 하루를 살아간 이야기, 매일의 고민 등 그때 그때 다른 글감으로 꾸준히 글을 썼습니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 글을 썼고, 정리된 생각을 잊지 않기 위해 글을 썼습니다. 오랜 기간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글로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블로그로 이웃들을 만났고, 생각이 같은 사람들과 연대하는 법도 배웠습니다. 스스로를 위해 쓰기 시작한 글이 타인에게도 위로가 된다는 것이 기뻤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글쓰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으로 소개할 활동은 연극입니다. 대학교 연극동아리에서 활동했던 것을 계기로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직장인 극단과 교사 연극모임, 공동육아 마당극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꾸준히 연극 활동에 참여해 왔습니다. 타인의 역할을 연기하기 위해서 타인의 삶을 이해해야 했고, 온전한 이해와 공감 없이는 제대로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타인을 이해하기 전에 스스로의 삶을 이해해야 했고, 나의 목소리를 찾아야 했습니다. 무대에서 목소리를 내는 법을 배우면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배웠습니다.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며 나의 의견을 말하고 설득하는 방법을 배운 것도 연극 무대의 경험입니다.
흔히 배우, 관객, 희곡을 연극의 3요소라 합니다. 그러나 연극은 이 3요소가 담지 못하는 수많은 요소들을 필요로 합니다. 대본을 정하고 배우를 캐스팅한 후, 의상, 소품, 분장과 무대장치, 음향, 조명 담당자가 필요하며 이 모든 요소를 조율할 연출과 조연출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연극의 준비 과정은 하나의 사회와도 같습니다. 연극에 참여하고 함께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를 이해하고 타인을 이해하며 함께 나아가는 법을 배웠습니다.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조화롭게 커질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3. 대학 졸업 후 배려, 나눔, 협력, 갈등 관리 등을 실천한 사례를 들고, 그 과정을 통해 배우고 느낀 점을 기술해 주시기 바랍니다. (띄어쓰기 포함 1,000자 이내)
몇 년 전 졸업한 아이들과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선생님, 그때 미적분 정말 잘 배웠습니다!’하고 인사하는 녀석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선생님, 그때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선생님, 그때 제 편이 되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은 꽤 있는데 말입니다. 제가 수학을 가르치는 순간에, 아이들은 저의 모든 것을 배우고 있었던 겁니다.
교사를 ‘배워서 남 주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지식을 가르치고, 가르치기 위해 공부하기 때문입니다. 처음 교단에 설 때는 저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잘 가르치기 위해 많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배운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교사는 지식을 가르치지만 학생은 인성을 배운다는 사실을, 경력이 더해지며 알게 되었습니다.
교사는 배워서 남을 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잘 가르치기 위해 많이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잘 가르치기 위해 교사가 해야 할 일은,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것, 그거면 충분했다는 것을, 10년차 교사가 되어서야 깨닫습니다. 지식이 아니라 마음을 나누는 교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