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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딸공 Sep 26. 2020

어머님,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일일딸공] 우리는 같은 스탠스 아닌가요?


스물넷, 어린 나이에 어린 줄 모르고 결혼을 했다. 나는 남편만 생기면 충분했는데, 어머님 아버님도 모자라 네 살이나 많은 시동생까지 갑자기 생겨버렸다. 평생 동생이란 존재를 모르고 산 내가, 하루아침에 시동생이 가족 같을 리 없다, 그래도 어린 나는 딴에 멋모르고 애를 썼다.      


결혼하고 첫 명절이 추석이었던가. 전남 장흥, 생전 처음 가보는 시골집에서 전을 굽고 생선을 쪘다. 제사 문화라는 것은 ‘문화’인 줄 알았는데, 알던 것과 상에 오른 것이 하나부터 열까지 달랐다. ‘문화’라는 것의 기본 속성은 공통성 아닌가, 어린 며느리는 차례상 앞에서 ‘공동체를 관통하는 공통의 그 무엇’을 찾아 무던히도 애를 쓰다가, 공집합에 가까운 교집합을 깨닫고 아연해 졌다.      


생쌀이 아니라 올벼 쌀이라 했다.

생선은 굽지 않고 찐다 했다.

삼색 나물에는 토란대가 들어갔다.

껍질 깐 팥고물에 모시 송편이 큼직했다.

꼬막은 통째로 데쳐 올린다.

허둥대는 나와 익숙한 그들.      


차례상을 물리고 아침 식사를 한다. 제기 가득 꼬막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입 안 벌린 녀석들까지 자비 없이 해체되는 손길의 능숙함. 낯선 미역국에 올벼 쌀밥을 말아먹으며 무슨 생각을 했더라. 지금쯤 내 엄마 첫 차례상은 절에서 지내고 있겠구나, 엄마의 차례는 문화랄 게 없는데. 불행인가, 다행인가. 대충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 저희 이제 가볼 게요.
- 작은댁 어른들도 다 부모님 같은 분이시다. 작은 어른들도 다 아직인데 네가 먼저 가면 어쩌니!
- ........     


작은 어른들이 다 떠난 뒤에도, 어머님의 친정까지 따라가 인사를 올리고서야 장흥을 빠져나오던 첫 명절 스물넷의 어린 며느리, 나.      


그 분들은 부모님 같은 분들이지만,
포항에서 저 기다리는 사람은 진짜 제 아빠거든요.


이 말을 꺼내는 데에는 꼬박 18개월, 세 번의 명절이 더 필요했다.     


명절이 일 년에 두 번이더라고. 우리 그냥 한 번씩 번갈아 가자.
장흥에서 포항, 포항에서 다시 대전까지,
양쪽 다 다니기에는 진짜 너무 멀지?     


여섯 번의 명절을 지낸 뒤 나는 남편에게 통보했다. 상의는 필요 없었다. 나는 이미 지나치게 애썼다. 열두 그릇에 달하는 차례상의 주인 중에 내가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결혼 한 번 했을 뿐인데 생전 모르는 곳으로 나의 본적지가 옮겨진 것도 이미 충분히 억울했다. 남편은 쉽게 인정했고, 어른들의 허락은 필요 없었다. 우리는 그 후로 1년에 한 번, 추석에만 시가에 간다.      


나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남편이 참 착하다고 한다. 꼬박 3년을 애쓴 나보다 3년이나 지나서 고개 한번 까딱해준 남편이 더 착한 사람이 되고 만다. 어른들이 참 좋으시다고 한다. 요즘 세상에 그런 분들 어디 계시냐며.      

다 자식들 잘 되라고 그러는 거지 뭐 별거 있간디      


어머님도 한때는 어린 며느리였을 터, 올벼 쌀로 밥을 하고 토란대를 다듬고 꼬막을 데쳐 상에 올리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속없는 나의 질문에 답변이 익숙하다. 순간, 제사상 앞에서 이유 모를 정성을 쏟던 내 엄마가 떠올라 더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다 자식들 잘 되라고 그러는 거라고.      


- 나도 이제 편히 살란다. 차례 음식 간단히 하고, 전은 대충 사왔다. 얼른 하고 요양원에 외할머니 보러 갈란다.
- 잘하셨어요, 어머니!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어느덧 결혼 십오 년 차, 지낸 명절이 서른 번에 가까워지며 가는 날은 가는 대로, 안 가는 날은 안가는 대로 즐기며 쉬는 법을 배웠다.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었던 건 결코 아니었는데, 없는 솜씨로 약밥을 만들고 골판지에 리본 포장까지 달아갔던 걸 떠올리면 사실은 꽤 예쁨받고 싶은 며느리였던 것도 같은데, 일방적인 억울함을 적체하며 버티기에 나는 절대 괜찮지가 않았다. 자식들 잘되라고 그러는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닌데, 따지고 보면 우리는 같은 며느리들 아닌가.      


새로 맞이한 이 집의 또 다른 며느리가 말한다.      

형님 덕분에 저희도 편하게 가요,
네, OO씨, 우리 편하게 삽시다.     


어머님의 믿음처럼, 어머님이 해오신 수십 년의 노고 덕분에 내 남편이 복을 받은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타인의 노고를 대가로 받는 복은 이제 그만했으면 싶다. 내가 아는 이 세상 최고 꼰대 나의 아빠도, 딸이 명절에 놀러 오는 걸 반기기 시작했다. 시댁에 도리를 다 하라더니, 그래도 딸 얼굴은 반가운 거다. 그렇게 세상은 변하고 있다. 아직도 멀고도 멀었지만.      


우리 그냥 서로의 복을 빌며, 반가운 마음만 나눕시다. 어머님 그동안 수고 많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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