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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딸공 Jul 26. 2020

그날 오후, 샤프심이 세 번 부러졌다.

     

- 6일이니까 6번이 풀어.

- 못 풀어? 뒤로.

- 7번? 못 풀어? 뒤로.

- 8번? 못 풀어? 뒤로.

.

.

.

나는 10번이었다. 그러니까 11번은 안심해도 된다. 6일은 적당한 날이다. 교실 뒤편에 고개 숙인 채 쌓인 아이가 네댓 명쯤이면 몽둥이로 때리기 딱 적당한 인원이니까. 그보다 적으면 몽둥이 놀림에 흥이 안 나고 많으면 흥이 과했다. 그러니까 4일이나 9일보다 6일은, 꽤 좋은 날이었다. 그날 오후 샤프심이 세 번 부러지지만 않았어도.           


시작부터 착한 마음을 먹을 수 없는 여름이었다.

여름방학인데 보충이라니.

난, 혼자, 조용히, 내, 공부를, 하고 싶다고!      

소용없었다.      


보충수업은 정규도 아닌데 왜 선택할 수 없나요? 보충수업비 가통에 나온 전기세는 인원수로 곱하니까 너무 많은데요? 에어컨도 맨날 끄면서 정말 이만큼의 전기세가 나오는 건가요? 방학이니까 그냥 혼자 공부하면 안되나요? 이걸 강제해도 돼요? 어차피 뺄 수 없음을 알면서도 굳이 따지고 들었다가 미운털을 곱절로 박히고 마는 나, 싫다고요, 정말.     


굳이 변명하자면 나는 착한 사람이다. 누가 나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아니, 누가 나를 <부당하게> 건드리지만 않으면. 시작부터 어긋난 그해, 1998년의 여름도 그랬다. 나는 학기 중에 못다 한 탐구과목을 정리할 생각이었고, 시간에 허덕이느라 미뤄둔 몇 가지 공부를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책도 읽으려 했고, 문제집도 충분히 풀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그러니까 나는, 쏟아지는 수업과 과제를 텀벙텀벙 피해 겨우 숨만 쉬고 있는 상태였다. 여름방학 하나만 바라본 채로.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의 강제된 일과를 방학이라고 추가 수업비까지 내가며 착하게 삼키기에, 그 여름 나는 너무 지쳐있었다. 그냥 그게 다였다.      


오늘 나와서 풀라고 할 게 뻔한 이차곡선 문제를 앞에 두고 고민하는 아이는 없었다. 6, 7, 8, 9번이 맞으면 10번이 풀고 끝, 오늘은 적당한 6일이니까. 6번이나 7번이 문제를 풀어도 다른 걸 시킬 게 뻔했다. 중요한 건 적당히 흥을 채울 너덧 명의 아이들이지 정확한 해설이 아니니까. 그런데 샤프심이 부러졌다.      


아이씨.. 보충비는 그렇게 받으면서 에어컨은 왜 자꾸 끄는 거야. EBS 파이널의 얇은 종이가 젖고 있었고, 11번은 날 바라보며 다행이라고 말했다. 교복 치마 속에 체육복을 미리 껴입는 6번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고쳐 잡은 샤프심이, 또 부러졌다. 아씨.. 진짜 오늘 왜 이래?      


물론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다. 그러니 내가 기억하는 그 모습은 왜곡되었을 것이 분명하고 이 글은 거의 소설일 거다. 학교에서 이런 비교육적인 일이 벌어질 리 없잖아. 문제를 못 푼다고 아이를 때리면서 흥이 나는 교사가 있을 리 없지. 다만 이십 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분명히 기억나는 것은, 세 번째 샤프심이 부러졌을 때, 내가 갑자기 울어버렸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6번과 나란히 엎드려 엉덩이를 맞으면서 뜨겁고 빨간 공기에 푹 젖은 두 얼굴이 마주쳤다. 그리고 큭, 웃어버렸다. 그 때문에 더 맞았다.      


- 나 나갈 건데, 갈래?

- 나간다고? 어딜?

- 몰라. 바다보러 갈 거야.


딱히 반항하는 아이는 아니었는데, 아니 굳이 범주를 정하자면 성실하지만 착하지 않은 학생이었으니 모범생 스펙트럼의 끄트머리쯤엔 있었을 텐데, 그날은 어쩔 수 없었다. 샤프심이 세 번이나 부러졌잖아. 잠시 집에 들러 삼만 원을 챙기고 동대구역에서 포항역으로 가는 통일호에 올라타는 순간에도 곁눈으로 돌아오는 막차 시간을 확인할 만큼, 사실 나는 소심했다. 휴대폰은 물론 삐삐도 없던 우리였다. 어차피 야자 끝나는 시간이 11시니까 그 전에 집에 돌아가면 아무도 모르는 거지 뭐.      


포항역에서 내려 뭘 했더라. 스티커 사진을 찍고, 뭔가 군것질도 했던 것 같은데. 북부해수욕장 모래 바닥은 해가 진 뒤에도 꽤 오래 뜨겁네. 교복을 갈아입었어야 했는데 불편하다, 다시는 치마 따위 입고 바다에 오지 말아야지. 뭐래, 난 대학 가면 예쁜 치마입고 놀러올 건데? 아 난 싫은데? 평소보다 훨씬 과장해서 웃고 떠들며 대화가 멈추지 않도록 긴장하는 나. 결국 참지 못하고 말해버린다.      


- ...... 집에서 알았을까?     


학교를 떠난 지 여섯 시간 만에 처음으로 입 밖에 낸 질문. 집에서 알면 어떻게 되는 거지? 우리 혼날까?      


바닷가의 불빛이 한순간에 꺼졌다.

불꽃놀이를 하며 뛰어다니던 아이들도,

좌판에서 호객행위를 하던 상인들도,

밀려들던 차들도,

바다와 땅의 모든 생기가 그대로 녹아 검정이 되었다.

과장해서 웃느라 몇 시간이나 부풀어 있던 광대뼈에 힘을 빼며...

블랙아웃.     


- 나 하고 싶은 게 있어. 어차피 혼날 거 그냥 해볼래. 근데 어쩌면 안 혼날 수도 있을 거 같아.      


깜깜한 어둠 속에서 빛나는 고양이를 볼 때면, 나는 항상 그날의 눈빛을 떠올린다. 멜팅검정 속에서 반짝이던 내 친구의 두 눈. 어쩌면 안 혼날 수도 있단 말에 아까 못 푼 이차곡선 문제의 풀이가 떠올랐던 것도. 에잇, 별것도 아닌데 왜 샤프심이 부러져 가지고.      


그날 밤 우리는, 나란히 삭발을 했다.      


한번은 해보고 싶었는데 왠지 오늘 같은 날에 해야 할 거 같다는 친구 말에, 왠지 나도 그러고 가면 혼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서 함께했다. 생각해보면 샤프심이 부러진 건 나니까, 내 샤프심의 피해자인 친구만 혼자 삭발하게 두면 안 될 거 같았고, 둘이 같이 깎으면 천원 빼준다는 미장원 아줌마의 기묘한 제안에 설득당한 것도 있었다. 삭발을 하고 나면 용기가 생길 거 같았는데 거울 속의 낯선 모습에 오히려 더 겁이 났던 건 비밀이다. 사실 나는 엄청나게 쫄아있었다.      


그 후로 그들은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라는 결론이면 좋을 텐데, 사실 학교로 돌아와서 많이 혼났다. 맞지는 않았지만 꽤 오래 혼났다. 그래도 우리를 때리지 않았던 건, 잘못 건드리면 큰일 날 거 같은 몰골 덕도 있었지만, 우수에 찬 눈빛으로 친구가 날린 ‘선생님, 사는 게 뭘까요’ 한 마디 덕이 컸다. 죽고 싶어 나갔는데 살아서 왔어요, 죄송해요. 라고. 내 친구는 지금 꽤 알아주는 배우가 되었다. 정확히 한 달 뒤에 졸업앨범 촬영이 있는 걸 계산하지 못했던 건 우리가 그만큼 순수했다는 증거다. 덕분에 나의 고등학교 졸업앨범은 지금도 발견 즉시 불태워 마땅한 금서가 되었다.


보충수업을 그렇게 싫어하던 나는, 여전히 보충수업을 싫어하는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이 글은 평화로운 일요일 오후, 다음 주에 아이들에게 나눠 줄 이차곡선 문제를 만들다가 샤프심이 부러져서 써보는 뻘글이다. 소설이다.


설마 학교가, 교사가, 그랬을 리 없잖아?


다만 나는,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그 어른들을 닮아가진 않는지 날마다 조심할 뿐이다. 물론 이건 소설이고 다 꾸며낸 이야기지만. 그날 밤 북부해수욕장 모래는 뜨겁고 많이 따가웠다. 바다는 생각보다, 시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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