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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딸공 Nov 08. 2020

졸업앨범, 담임이 빠지면 망친다고요??

국민학교 떡볶이를 기억하시나요?

국민학교 때 길에서 먹던 떡볶이는 두 종류가 있었다. 백 원어치 일 인분을 시키면 비닐 씌운 접시에 떡 대여섯 개와 약간의 국물을 담아주는 방식이 하나였고, 걸쭉한 진빨강의 국물에 가래떡이 버무려져 있어 떡 하나에 백 원씩 받고 파는 방식이 다른 하나였다. 떡 한 줄에 백 원은 꽤 비싼 가격이었지만 가래떡이 워낙 굵고 실한 데다 끈적이는 소스의 맛도 일품이어서 나는 주로 후자 쪽을 좋아했다. 떡볶이 가게에서는 어묵도 팔았기 때문에 떡볶이 객들의 스탠딩 바에는 간장 항아리가 항상 있었다. 새카만 간장에 청고추 홍고추 양파를 썰어 담은 항아리는 거쳐간 객들 만큼이나 그 깊이와 역사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어묵 국물을 위한 빨간 플라스틱 미니 바가지가 있었다. 플라스틱 특유의 씻기지 않은 미끈한 기름을 빛내며.      


백 원짜리 하나를 동전 항아리에 던져 넣고, 동전의 온기가 가시기 전에 철판의 떡볶이를 한 눈으로 스캔한다. 사람의 가위질이란 어딘가 빈틈이 있게 마련이어서 꼼꼼한 스캔의 대가로 나는 늘 평균보다 조금 긴 길이의 떡을 골라 잡을 수 있었다. 손잡이에 인삼이 그려진 은색 스테인리스 포크를 들고 선택받은 나의 떡 가운데를 푹 찍는다. 걸쭉한 떡볶이 소스를 양껏 묻힌 다음 앞니로 살짝 베어 문다. 쫀득한 가래떡은 씹을 때마다 쩍쩍쩍 소리가 났다. 새하얀 속살이 드러난 가래떡의 절단면을 다시 한번 철판에 담근다. 적당한 점도의 소스가 달라붙어 한 입 먹은 가래떡이 순식간에 새것이 된다. 단장한 가래떡을 또 한 입을 베어 문다. 추정컨대 길어야 약 십삼 센티미터 정도였을 가래떡 한 줄을 대여섯 번에 나누어 먹으며, 한입 베어 물고 소스를 바르고, 또 한입 베어 물고 소스를 바른다. 기름기가 배어 손잡이까지 미끄러운 빨간색 미니 바가지에 어묵 국물을 떠 호호 불어 마신다.      

먹던 떡을 철판에 다시 담그며 어린 나는 단 한 번도 주저한 적이 없다. 항아리 간장에 어묵을 찍을 때도 그 간장이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는지, 왜 같은 양파인데 흰 것 검은 것이 같이 있는지, 궁금해했던 적이 없다. 다 먹은 국물 바가지는 따로 두는데 왜 늘 바가지는 미끄러운 것인지도, 궁금해하거나 의심한 적이 없다. 그 길에 서 있던 떡볶이 객들은 누구나 그렇게 먹었다. 내 앞에 선 사람이 그러했고, 내 뒤에 선 사람도 그러했다.

  

먹던 떡을 조리 중인 국물에 다시 넣고, 이 사람 저 사람이 간장을 찍어 먹지만, 간장이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설거지를 하는지 안 하는지 모르는 바가지로 여러 사람이 국물을 떠먹는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지금 떠올려보면 매우 경악할 만한 추억이다. 그 시절에는 아무렇지도 않았고, 누구나 그러해서 당연했지만 말이다.           




- 아이들을 생각해서 찍으셔야죠?
- 졸업앨범에 교사가 사진을 안 찍으면 아이들을 생각 안 하는 건가요?
- 아니 담임교사 사진이 없으면 어떡해요, 그건 앨범을 망쳐놓는 짓이죠.      


지난 수요일 담임 학급 아이들의 졸업앨범 촬영이 있었다. 깊어가는 가을날 교복만 입어도 예쁜 아이들이 꽃단장까지 하고 사진을 찍으니 어찌나 예쁘고 싱그럽던지. 들뜬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단체 촬영이란 것에 부정적이던 마음까지 살짝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학교 졸업앨범에 전 교사의 얼굴과 실명이 들어가는 일은 늘 탐탁지 않았지만, 나만 빠지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신규 때부터 매년 촬영에 응해왔다. 그러다가 교사의 얼굴도 개인정보라 정보 주체의 동의 없이 앨범에 실으면 안 된다는 공문이 작년에 내려왔고, 이 또한 시대의 흐름이다 싶어 졸업앨범 담당자에게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작년, 발령 9년 만에 처음으로, 졸업앨범에 내 얼굴을 넣지 않는 일에 성공했다. 문제는 올해였다.      


전체 교사 중 1인이었던 작년과는 달리, 올해는 졸업앨범 주인공들의 담임이니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아이들의 추억을 위해서이며, 담임 얼굴이 빠지는 건 앨범을 망치는 행위라고 했다. (참고로 이 발언은 사진기사님의 말이다.) 빈칸으로 두면 앨범을 망친다 해서 빈칸 대신 넣을 만한 예쁜 풍경 사진이라도 보내드릴게요, 했다. 그러나 졸업앨범에 담임이 빠지다니,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냐며, 소리를 지르며 화까지 낸다. 그와는 더 이상 대화가 되지 않았다.      


저는 동의한 적 없는데요?     


담임이라면 졸업앨범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까? 담임이 빠지는 건 정말 앨범을 망치는 짓일까? 내가 가진 국민학교 졸업앨범의 마지막 페이지엔 전교생의 집 주소와 전화번호까지 나와 있다. 지금으로 치면 상상도 못할, 그야말로 경악할 일이지만 그때는 당연한 일이었다. 어쩌면 십 년, 이십 년쯤 뒤에는, 졸업앨범에 담임 얼굴이 들어갔다고? 동의한 적도 없는데? 상상도 못할 일인 걸? 할지도 모른다. (솔직히 나는 졸업앨범이라는 게 그때까지 남아있을 것 같지도 않다.)     


매년 같은 틀에 얼굴만 바꿔가며 몇만 원씩 받아 파는 졸업앨범의 틀, 이제는 진짜 바꿀 때가 지나지 않았나? 담임이나 인연도 없는 전체 교직원 얼굴은 빼고, 원하는 아이들의 예쁜 얼굴만 가득가득 넣어 주는 게 진짜 추억 아닌가? 담임이 사진 안 찍는다고 빈칸이 있어 앨범을 망친다는 대답은 그야말로 아마추어 아닌가 말이다.      


사실은 나도 사진 찍는 걸 좋아한다. 시도 때도 없이 카메라를 들이대고 아이들과 찍는 셀카도 즐긴다. 단지 나는, 잔뜩 굳은 어깨와 어색한 표정을 디지털 지우개로 뭉개놓은 정체 불명의 사진을 평생 몇번 꺼내보지 않을 졸업앨범에 담임이란 이유로 반드시 넣어야 한다는 게 싫을 뿐이다. 아이들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자유롭고 편안하게 더 많은 사진을 찍어 남길 용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싫은 것에 동의 하지 않을 자유,  정도는 있어야 하는  아닌가? 생각할 뿐이다.


사장님, 졸업앨범에 담임이 들어가야 당연하다는 거, 그거 현재 시점에서나 그런 겁니다. 나중에 생각하면 경악할 일일지도 몰라요. 한입 먹은 떡볶이를 다시 철판에 찍어 먹던 것처럼 말이죠.      



(요즘은 당연히) 개인 그릇에 썰어 담아주는 대전 은행동 골목의 떡볶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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