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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쑥쑤루쑥 May 23. 2021

낄끼빠빠, 평생의 덕목.

학교가 약육강식의 정글 같단 육아 선배의 말이 떠오른다. 설렘과 즐거움 가득한 시간이길 바라는 내 맘과는 별개로 아직 인간관계에 서툰 아이들이 모인 그곳에서 아이가 종종 맞닥뜨리는 불편한 상황이 몹시 신경 쓰이곤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일단 앞뒤 상황 얘기를 들어보고, 속상한 마음을 토닥이고, 재발 방지를 위해 내 아이가 취해볼 수 있는 조치에 대해 나름의 방법을 알려주는 것. 나름의 솔루션도 육아서에서 발췌한 듯 세련되고 우아한 답변이 즉각 나오는 게 절대 아니다. 치열한 과정을 거친다. 나 홀로 또는 부부 선에서 고민하기도 하고, 그래도 알쏭달쏭할 땐 육아 선배에게 조언을 구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참으로 어려운 게 어른이 개입할 문제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유치원 다닐 적 같은 반 아이가 충격적인 언행을 해서 담임 선생님께 전화로 알린 적이 몇 번 있었다. 여섯일곱 살이면 자기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저 어디서 주워듣고 모방해 본 것이라 추측은 하지만, 그래도 그냥 넘기기엔 도가 지나쳤기 때문이다. 상대 아이가 자기가 한 언행임을 시인하고, 선생님은 해선 안 될 말임을 알려주고, 아이들은 화해하고 매번 그렇게 잘 넘어갔었다. 그러고 나서는 정말 언제 그랬냐는 듯 아이들은 또 사이좋게 잘 지냈다.


이제 큰 아이는 어엿한 '초딩'이 되었다. 급우들은 더 많아졌고, 스스로 해내야 하는 활동이 늘어난 만큼 어른의 통제나 손길이 일일이 닿지 않는 순간도 잦아졌다. 한 번씩 학교에서 겪은 속상한 일을 털어놓을 때면 나는 그 고민에 더해 '낄끼빠빠'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전면 등교 덕에 매일같이 학교에 간 지난 석 달 여간 다행히 아직 선생님께 중재를 요청드린 적은 없다. 일이 없었던 게 아니다. 서러운 울음을 동반한 아이의 성토도 몇 차례 있었다. 그러나 유치원 때라면 담임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했을 상황도 그러지 않는 방향으로 일단 가보는 중이다.


그 과정에서 아이다운 유연함이 도드라지기도 한다. 자기 마음을 헤집는 언행을 하고 사과도 않던 친구가 사실은 자기와 놀고 싶어 했던 것 같다고도 했고, 최근 자꾸 비아냥거리고 잔혹한 농담을 해서 스트레스를 주던 친구에게는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거라고도 했다 (한 번만 더 지켜본단 뜻). 어른 같으면 사소한 갈등이 자존심 대결로까지 번져, 한 번의 삐걱거림으로 관계가 흔들릴 수도 있을 텐데. 그렇게 내가 알려 준 방법 말고 본인만의 방법으로 헤쳐나가기 시작하는 걸 보니, 조금은 안심이 되고 그런 어른인 게 부끄럽기도 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육아가 아주 순조로운 걸로 오해받겠다. 사실은 이렇게 되기까지 정말 여러 일이 있었다. 매번 처음 겪는 일이었고, 나는 아이 앞에서 자주 파르르 떨었었다. 그러다 아주 약간 담담하게 듣게 되는 경우도 어쩌다 한 번씩 생겼을 뿐, 소심하고 순해빠진 큰 아이가 하교 후 웃는 얼굴일 때 여전히 나는 속으로 크게 안도한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매번 이렇게 파르르 떨다간 내 명에 못 살겠단 깨달음도 일조했음이다.


사람마다 성격도 행동도 각양각색임을, 사이좋던 친구랑 싸울 수도 있고 비호감이던 친구가 알고 보면 괜찮을 수도 있음을, 좋은 사이를 오래도록 유지하려면 서로 많은 노력을 해야 함을 조금이나마 아이가 알게 되면 좋겠다. 그 과정에서 아이만의 잔근육이 발달하면 좋겠다.


사실, 내가 판단을 잘못한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유치원 때 큰 아이가 내게 지나가듯 성토했지만 나는 가볍게 생각하고 넘겼던 급우와의 일화를 초등학교 입학 후 큰 아이가 한 번씩 얘기하는 게 아닌가. 그 아이가 다른 학교를 가서 좋다며. 또다시 이런 실수를 하지 말란 법이 없다. 아이가 속상한 일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이 펼쳐질지도 알 수 없다. 누군가의 표현에 따르면 사람이 아니라 아직 짐승(!)인 나이. 내 아이도 서툴기 짝이 없다. 다만, 나는 또다시 파르르 떨지언정 치열하게 고민할 것이다. 그렇게 아이와 함께 우리만의 데이터를 축적해 나가보려 한다. 본인의 희로애락을 솔직하게 표현해주는 아이에게 고마워하면서. 그리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잘 모르겠으면 조언자들에게 부지런히 물어가면서 (마이 프레셔스 육아 선배와 멘토들, 쌩유!).


낄끼빠빠. 눈치가 요긴했던 직장생활 시절에만 필요한 줄 알았다. 낄끼빠빠는 영구 탑재해야 할 덕목인가 보다.







Photo by Benjamin Davie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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