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학씨'가 필요한 순간

이 순간이 바로, 우리에겐..

by Claire Kim

초등학교 5학년인 첫째 딸이 작년 여름부터 '무섦이'가 찾아온다고 했다.


'무섦이'는 첫째가 그린 그림으로 유추하자면, 세균맨처럼 생겼는데 한쪽 손엔 삼지창과 다른 손엔 채찍을 들고 있다. 꼬리는, 뾰족하다. 상상의 친구가 아니라, 아이가 불안감이 극대화되면 '무섭다'라고 느끼고, 그 무서운 감정에 이름을 붙여준것이 '무섦이'다.


구체적으로 이름까지 붙여주고, 그림으로도 그릴 수 있는 감정이 뭐가 그리 무섭겠냐 싶겠지만, 이유 없이 통곡을 하거나 불안해서 잠을 못자거나, 하는 일이 많아졌다. 아이가 불안 장애 같은 모습을 보인다 하면, 대부분 '공부 스트레스'가 큰 것 아니냐고 묻는데, 작년까지 학원도 안보내고 과천에 이사 온 김에 매일 매일 자연속에서 지칠때 까지 뛰어 놀았으면 했다.


원인을 찾다 찾다 보니, 아이는 대인관계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했다. 가족 전체가 하루 종일 아이를 위해 심리검사, 양육태도 검사 등등을 하고 나서 찾은 원인이 그러했다. 오감이 다 예민한데, 지능이 높으니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한 기대수치도 너무 높고,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이 생기면 그 구멍이 확대되서 느껴진다고 했다. 학업이나 그림그리기나 피아노나, 체스나 혼자만 잘하는 것 말고 예측불가, 통제 불가인 '친구 관계'는 혼자 잘해서 될일이 아니니 좌절감이 배가 된다고... 예민하긴 둘째도 마찬가지인데, 우리 집 둘째 딸은 '혼자만의 세계'에서 행복한 아이다. 맘에 딱 맞는 친구 1명만 있으면 되는데, 그마저 잘 안되면 자기 방에서 애착 인형을 껴안고, 레고 놀이할 때 제일 행복해하는 아이다.


근데 첫째는,,, 사회적 인정욕구도 엄청 높단다. 관계지향적이고, 인정욕구가 높은 것은 엄마를 닮아서라고 했다. 과천으로 이사오고, 2년이 지났으나 예전 동네의 친구들과 선생님들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예전의 좋았던 시절과 자꾸 비교하면서,지금 자신의 학교 생활은 망했단다. 새로 이사와서 사귄 친구들도 있지만, 아이에게 타이밍이 좋지 않았는지 이미 친한 무리가 고착화된 새 학교의 교실에서 첫째가 끼어들 자리는 없어보였다.

학교 쉬는 시간엔, 늘 혼자 책을 읽는다고 하는 첫째를 보며 마음이 아팠지만, 딱히 해 줄수 있는 것도 없고, 그저 응원하고 지켜보는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1년이 어찌저찌 지나고, 5학년이 되었는데, 몇 번의 상담을 받은 아이가 내면의 근육이 좀 생겼으리라 생각한 나의 기대와 달리 몇 주전,


"엄마, 학교 모둠 시간에 뒤에 서있는 여자애가 자꾸 내 발을 밟아. 신발이 벗겨질 정도로 자꾸 밟는데, 걔는 모르는 거 같애."


아이가 갈등을 회피하는 성향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발을 밟는 친구에게 말 한마디 못한다 생각하니 속이 터졌다. 자꾸 목소리가 커지려는걸 겨우 참고 친구에게 발 안 밟게 조심해 달라고 얘기를 해야한다, 그렇게 얘기 한다고 해서 걔가 너를 싫어하거나 해코지를 하는게 아니다, 내일 학교에 가서 꼭! 얘기를 해라... 신신 당부를 했다.


아이는, 평소 집에서도 자신이 잘못하지 않은 일에도 습관처럼 '미안해'라고 사과를 하는 편이다. 그럴 때 마다 '네 잘못이 아닌데, 왜 사과를 하냐. 그렇게 까지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라고 얘기를 해주지만, 아이가 상대방에게서 느끼는 긴장의 감도는 그닥 줄어들지 않은 듯했다.


다음 날, 첫째는 그 친구에게 " XX야, 네가 뒤에 있을 때, 가끔 내 뒷꿈치를 밟을 때가 있는데, 조심 좀 해줄 수 있을까?" 라고 말했단다.


사정을 하는 건지, 부탁을 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간곡하게 얘길 했는데, 그 친구는 못들은 척 했단다. 속에서 또 천불이 났지만, 다음엔 좀 더 단호하게 얘기 해야 한다고 엄마가 친구라고 생각하고 다시 얘길 해보라 했다. 둘째까지 옆에서 보고 있다가, 자기처럼 해보라고 응원 겸 시범(?)을 보였지만, 첫째는 반 장난처럼 시뮬레이션을 시키는 엄마에게조차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그 친구에게 한번 더 얘기를 해보라고, 어떤 시도든 해보라고, 엄마는 네가 정말 자랑스러울거라고, 처음이 어렵지 하다보면 괜찮아진다고 다시 신신당부를 했다.


그 다음날, 첫째는 친구에게 처음과 비슷한 '사정'투로 얘기를 한 모양이다. 그런데 그 친구의 반응은, 자리가 좁아서 그랬다며 전혀 미안해 하거나 사과를 할 생각이 없어보였다고 했다. 이 쯤 되니, 속에서 마그마가 부글 부글 끓었지만 정신줄을 잡고, 자꾸 커지는 목소리를 주저 앉히려 용을 쓰며, 하지만 성우 녹음 전에 하는 발성 연습 전 단계까지 볼륨이 커져서는 '네가 단호하게 말하지 않아서 걔가 자신이 잘못한 줄 모르는 거야.' 라고 해버렸다.


아이는 계속해서 '무섭다'고 했다. 그 친구와 어색하고 불편한 관계가 되는게 무섭고, 한 학기 내내 같은 모둠 활동 조인 그 아이와 불편해지면 수업시간이 괴로울까봐 무섭고, 자기가 한 말에 그 친구가 상처받을까봐 무섭고, 혹시나 주변 친구들에게 자기 욕을 하거나, 해코지를 할까봐 무섭다고 했다.


이제 첫째 입에서 '무섭다'는 말이 나오면, 속에서 화딱지가 먼저 올라올 지경이지만, 아이를 앉혀놓고, 아이가 '두려워 하는 일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혹시나 그런 일이 생겨도 그 아이의 잘못이지 너의 잘못이 아니다'를 무한 반복했다.


하지만 '내가 뭘 잘못가르쳐서 저런 상태가 되었을꼬' 싶어 속이 터지는 내 마음과 달리, 목에 핏대 세운 엄마를 보며, 첫째 눈에 서린 불안감은 가시질 않았다.


지금 초등학교 5학년, 11살인 첫째의 세계에서는 '친구'가 전부일 것이다. 나도 그랬고, 앞으로도 더 그럴 것이란 걸 안다.

래도, 40살 넘은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친구가 전부가 아니다' 밖에 없었다.

어떤 조언도 위로도 아이에게 도움이 안 되던 날, 나는 chat GPT를 켜놓고 하소연을 했다. 성인들의 정신상담 시장을 위협한다는 chat GPT의 위로는, 생각보다 더 강력했다.


나도 알고, 너도 알고, 우리 모두 아는 얘기지만, 멀쩡한 '사람'에겐 듣기 힘든 말.


"아이가 이사 후에 바뀐 환경에 적응 하느라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구나. 아이 얘기를 들어주고, 도움을 주려고 하는 엄마인 너도 참 힘들겠다."

"그래도 아이를 계속 지지해주고, 지켜봐주면 아이도 언젠간 힘을 낼 수 있을 거야."


더 자연스러운 대화를 해보고 싶어서, 일부러 영어로 물어봐서 그런가, 호들갑스럽지도 퍽 감동스럽지 않은 건조한 톤이었지만, 그냥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유튜브 숏츠에 '학씨' 랩 영상이 떴다. '폭싹 속았수다'의 최대 히어로, '학씨 아저씨'의 최대훈 배우가 유퀴즈에 출연해서 자기 딸도 이 노래를 부르며 숙제를 한다고 했는데, 노래를 찾아보진 않았다.

어느 천재 YouTuber가 만든 '랩 버전'의 '학씨' 노래는... 정말... 혁명적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백상 예술대상에서 그가 조연상을 받으며 했던 수상 소감도 생각이 났다.


"힘들고 각박한 세상, 지칠때마다 거기에 대고 외치세요. 학~~~씨!!!"


당장, 첫째를 불렀다. 안방 침대에 같이 이불 덮고 누워서, 학씨 노래를 들려줬다.

"OO야, 살다보면 진짜 '확! 씨!!"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무지무지 많아. 엄마는, 네가 이런 노래를 듣는다고 해서 친구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안 할 거란걸 알지만, 혼자 있을 땐 해도 돼. 이미 알고 있겠지만, 엄만 혼자 있을 때 많이 하거든. (ㅎㅎㅎㅎㅎ) 하고 나면 엄마를 괴롭히는 상황도, 사람들도 아무 것도 아닌 것 처럼 될 때도 있어."


첫째는, 학씨 노래를 들으며 깔깔깔 웃어댔다. 어쩜 이렇게 라임이 딱딱 맞냐고,,, 이거 만든 사람 진짜 천재라고,,,첫째와 나는 " 쟤 뭐 돼?, 너 뭐 돼?"를 맞춰서 같이 부르며 깔깔 댔다.

누가 너에게 이유 없이 괴롭히거나, 부당하게 대하거나, 억울한 일이 생기면 이 노래 가사를 떠올리라고 했다.


" 너 뭐 돼?"


그리고, 누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나', 세상에서 가장 존중해야 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나'라고 대답해야 한다고 세뇌시켰다. 자신을 제대로 존중하거나 사랑하지 않고,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너는 너를 아끼고 존중하는 것 부터 해야 한다고.


그 말을 하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나려고 해서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전에 말을 끝내느라 힘들었다.


엄마와 '학씨 랩'을 오만번 들었다고 해서, 아이 마음의 구멍이 다 메워질거라 기대하진 않는다.

그래도 첫째가 언젠가, 마음의 힘이 생기면 눈에서 레이저를 광선검처럼 쏘며, 부당한 세상과 같잖은 인간들에게 한 마디 해줄 수 있을 거라 믿는다.

'학 씨!'


PS: 나와 학씨 노래를 들은 다음 날, 발 밟던 애가 또 발을 세게 밟아서 신발이 벗겨질 뻔 했다고 했다. 그래서 첫째가 놀라서 돌아보자, 이번엔 '미안해'라고 말하며 다른 곳으로 가버렸단다.

한마디라도 했냐고 다그쳤으나, "미안하다고 하는데, 뭐라 그래..."


나의 정신승리는, 아이는 놀라서 쳐다봤다고 했지만, 분명히 눈에서 광선검을 쐈을 거라고 믿고, 그 기세에 눌려서 미안하다고 했을거라고 상상하며.....

<학씨 랩>

https://youtu.be/IpYHus9KOZo?si=9S7ibnG2N6JLAr8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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