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This Is Me

변기 안쪽을 들여다보는 여자

마음속 스탑워치 끄기

by Claire Kim

우리 집에서 화장실 청소는 내 담당이다.

남편은 주로 집안 청소를 하는데, 딱히 곰팡이 공포증이 있는 것 같진 않지만 화장실 청소는 안 한다.

십 년 넘게 같이 사는 동안 집에 더 오래 머무는 내가 하다 버릇하니 변기 솔을 쥐고,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치는 게 더 번거로워서 그냥 내가 하고 만다.


가끔 나는 나 자신도 뜨악스러운 것에 집착하는 구석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세제'다.

자, 타칭 '자유로운' 영혼을 표방하며 정해진 틀과 각 잡힌 것들에 대한 혐오를 뿜으며 살았는데 이상하게 나이 들수록 집 안 시선이 닿는 곳은 칼 각에, 먼지 없이 정돈 그 자체였으면 좋겠다.


미학적으로 만족스러운 잘 정돈된 상태 말고도, 냄새에 민감한 내가 화장실에 온갖 분비물 배설물이 지나간 흔적이 공기에 쌓일 때 풍기는 지릿지릿한 냄새를 그냥 넘어갈 리 없다. 그래서 한번 뿌리면 마법처럼 얼룩과 곰팡내가 다 사라지는 상상을 하며, 유튜버와 쿠팡에서 추천하는 세제는 웬만큼 다 써본 것 같다. 결국은 유한락스만 한 게 없다로 결론이 날 것 같다.


그 덕에 화장실 청소 할 때마다 입었던 파자마 바지에는, 락스가 튀어서 생긴 점박이 얼룩무늬가 신사임당의 초충도 저리 가라다. 화장실뿐만 아니라 뽀얗게 삶겨서 나온 빨래, 인위적인 섬유유연제 냄새가 아닌 옷먼지와 때가 뿌리 뽑혔을 때만 풍기는, 깨끗한 섬유 냄새도 나의 변태 같은 취향 중에 하나다. 그러니, 빨래 세제, 화장실 청소 세제의 장바구니는 비워질 틈이 없다.


종일 행사 MC를 하고 온 날도, 하이힐에 혹사당한 종아리는 부러질 것 같고 몇 시간 공들여해 놓은 화장이 열 시간 지나자, 얼굴에 파라핀을 발라 놓은 느낌이지만 화장실 요주의의 그 냄새를 맡으면, 침대에 끙끙대며 누워있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인조 속눈썹도 못 뗀 채 나는, 유한락스 얼룩이 '이미' 묻은 바지를 챙겨 입고 변기와 화장실 바닥에 '분노의 세제'질을 한다. 한 시간 전까지, 블록체인의 Defi, 탈중앙화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발표자들을 소개하고 있었는데 조명이 꺼지고 무대에서 내려온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마이크 대신 변기 솔을 든다.

현관에 들어선 엄마를 보자마자 '오늘 바나나 응가를 두 번이나 했다'라고 만면에 자랑스러운 미소를 띠며 맞이해 주는 둘째를 안아 주고, 그녀가 애정하는 변기에 분노의 세제 질을 해야 하는 현실 말이다.


나는 국제행사 MC, 통역사, 영어 PT presenter, 성우 등, 여러 직함을 달고 있지만 사실 대부분의 시간은 집에서 보낸다. 일이 없을 땐 집에서 주로 영어 팟캐스트를 듣거나 미드를 본다는 게 다른 점일 수도 있지만, 엄마로, 주부로 사는 시간의 대부분은 세정력 좋은 세제에 집착하거나, 다이소에서 물얼룩 제일 잘 지우는

극세사를 고른다거나, 고구마 쌓아 놓은 상자에서 썩은 애들을 골라내거나 하는 게 대부분이다.


예전엔, 집안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너무 아까웠다. 집안일, 아이들을 돌보는 일의 노동은 보상도 없고 티도 나지 않으며 어디 자랑할 곳도 없다. 애 둘을 낳고 프리랜서 씬에서 멀어진 만큼 신속하게, 더 많이 경력을 쌓아야 한다는 압박감에 집안일하는 것이 즐거웠던 순간은 없었다. 안 할 수 없으니, 겨우겨우 구색만 맞추고 살자 했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한다'라고 생각했지만, 일도, 집안일도, 아이들을 키우는 것도 늘 함량미달이라 느끼며 마음속 깊은 곳, 안 꺼지는 스톱워치를 늘 켜놓고 사는 기분이었다.

요즘은, AI덕에(?) 일도 많이 줄었고 나이가 들면서 여기저기 몸이 고장 나면서 집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예전엔, 일이 없을 때 일부러라도 사람들을 더 만나고 번화가의 서점에서 죽치고 있거나 했지만, 최근엔 날이 추워지자 얼씨구나 좋다 하고 '합법적'으로 이불 동굴에 살고 있다.


아침에 애들 보내고 난 뒤, 이만 겨우 닦고 세수도 안 하고 극세사 이불을 뒤집어쓰고 핸드폰을 보다 보면 까무룩 졸고, 그러다 보면 1시간 2시간, 어쩔 땐 3시간씩 잘 때도 있다.

남편한테, 어느 날 일어났는데 옆에 반달곰이 있더라도 놀라지 말라했다.


지인들에겐 시간 나면 마늘이랑 쑥 좀 보내달라고, 이참에 사람 좀 되볼라한다고 농을 친다.

아무리 날이 추워지고, 올해 아파서 죽다 살아났다지만 이렇게 잠만 퍼대도 되는가, 가책이 느껴질 때면 화장실에 간다. 어제 새로 산 극세사로 닦은 수전이 어찌나 번쩍번쩍한 지 거울로 써도 될 정도다. 물얼룩을 퇴치했다. 너무나 만족스럽다.


그리고 변기 안쪽 굴곡진 부분에 시선이 가 닿는다. 보지 말자 보지 말자 속으로 계속 되뇌지만 이상하게 자꾸 노려보게 된다.

그 굴곡에 무엇이 살고 있었는지, 얼마나 오래 그곳에 있었는지 알고 싶지도 않은데, 자꾸만 시선이 간다.

약간 구역질이 날 것 같다. 다음 변기솔질할 때 저곳을 제대로 닦으려면 아무래도 변기 커브 모양으로 생긴 새 변기 솔을 사야 할 것 같다.


세제 팍팍 묻혀서 닦았는데 아무것도 안 나오면 행복할 것 같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시간을 꿋꿋이 닦고 문지르고 마음 속 세균과 박테리아와 싸우며, 변기의 때를 빼고 광을 내는 동안 나는 비로소, 스톱워치를 끄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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