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인가?
<물미역이 어때서>
제주 세화 앞 바다에, 미역이랑 같이 둥둥 떠다니는 느낌을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삶의 모든 긴장을 허파와 폐 세포 세포 사이에 야무지게 챙겨 넣은 도시인의 비루한 몸뚱이가,
어느 날 갑자기 에메랄드 빛 제주 바다에 뛰어 든다고 해서, 바로 물미역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제일 먼저 느껴지는 건, 순간 욕이 발사 될 만큼 뜨악한 바닷물의 차가움이고 그 다음엔, 바닷물의 짠맛이고,
'조금만 참으면 된다'를 계속 외치며 적응 시간을 가진 뒤에야 겨우 물 속에서 두리번 할 수 있는 수준이 된다.
한참을 두리번 거리고 주변에 내 수영복 몸매를 훑어볼 만한 사람들이 없는 걸 확인한 다음에야 뒤로 누워 볼 엄두가 생긴다. 그러고 겨우, 배영 자세를 취했는데, 작렬하는 제주의 햇빛이 나만 좋으라고 비껴갈리가 없다. 눈도 못뜨고 짠물을 몇번 먹은 다음에야 어정쩡한 자세로 몸에 힘을 조금 빼고 파닥 거리는 팔도 멈추고, 옹졸한 발차기도 거두고 '나는 물미역이다'를 오만번 외치면서남은 긴장을 몰아내려고 집중해본다.
잔잔한 파도에 걱정많은 몸뚱이를 맡기고 옆에 떠내려가는 미역인지 다시마인지 우묵가사리 사촌인지 모를 것이 손에 감기자 생각해본다.
공항에서 제주 땅만 밟으면 세 달간 스테로이드와 온갖 항생제에 쩔은 몸뚱이가 바로 '휴가'모드가 될 줄 알았지...
물론 초등 딸 내미 둘을 데리고 왔으니 온전히 나를 위한 휴가라고 생각 할 순 없으나, 돌발성 난청과 어지러움으로 호되게 인생 교훈을 얻었으니이젠 '쉬는 법'을 제대로 알고 있겠지, 라고 기대했던 내가 너무 순진했던 것을 제주에 도착하고 3일쯤 알게 되었다.
제대로 쉰다는 것은 무엇인가?
존재하는 순간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온전히 살아 있는 것에 집중하는 느낌은 어떤 것인가?
그동안, 아이들을 낳고 무수히 다녔던 해외 여행과 국내 여행지에서 나는 한번도 '휴가'라는 걸 가져 본적이 없다는 걸 아프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매번 여행을 갈 때 마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고 감사하자 되뇌이지만 오랜 습관이란 것이 그렇게 즉각적으로 바뀔리가 없다. 순간 순간 새로운 미각을 알게 해준 맛집에서 '행복하다' 외치고, 잘 뽑아낸 라테아트의 커피 한잔에 또 '이게 휴가지'라고 외쳤지만, 나의 정신머리 한 쪽은 프리랜서로 등록된 어플의 알람소리에 늘 촉각이 곤두세워져 있고, 일을 거절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의 죄책감과 회의감이 제주 여행 내내 남아 있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내 인생의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일시에', '단 한번에' 해결 되길 바라고 모든 일이 그런 '속도'로 이뤄져야 한다고 믿고 애썼던 것 같다.
신경정신과에서 우울증 치료를 하면서도 이 '치료'를 '우수한 성적으로' 무엇보다 '빨리' 해결하길 바란다는 나의 무의식이 꿈으로 표출 됐을 때, 그 때 나는 속도 지향적인 나의 자아가 얼마나 질기게 내 무의식과 의식에 붙어있는 지를 알게 됐다.
제주에 와서도, 호되게 혼나고 맞이하는 휴가이니, 나의 '휴가 자아'가 즉각적으로 찾아와 '빨리' 쉼의 모드로 바뀐다고 믿은 걸 보니 나는 아직 멀었다.
휴가 이후, 정신과 선생님을 만나 말했다.
"선생님, 이번 휴가는 여태 다녔던 여행 중에 제일 좋았는데, 휴식이란 것도 내가 의지를 들이고, 결단을 해야 할 수 있단 걸 알게 됐어요. 원래 휴식이라는게 이렇게 점차적인 건가요... 저는 제가 아주 즉각적으로 (극한 효율적으로) 휴식 할 수 있을 줄 알았거든요..."
선생님은 '적극적인 휴식'을 얘기하시면서, 원래 '쉰다'는 것은 점차적으로 의지를 많이 들여야 가능하다고 하셨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3개월 만에 영어 PT대행을 맡아서 준비하고 있다. 난청과 어지러움으로 바닥을 치는 동안 이제 머리 많이 쓰는 초고도 집중 일은 절대 못하겠거니 했는데, 제주에서도 거절했던 무수한 일들 중 이상하게 이번 PT는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해도 될까... 다시 아프면 어쩌지...또 걱정 많은 몸뚱아리와 정신머리를 가지고 상담을 했는데, "안 해서 후회 할 것 같으면 해보는 거죠. 사실 한다고 해서 죽는 건 아니잖아요?" 늘 쿨하신 선생님의 답변에, 그렇지, 이거 한다고 죽는 건 아니지. 망치면 뭐, 죽을 때 까지 안하는거지 뭐. 라고 결론을 내보려고 했다.
그러나, 강남 학동역에 있는 고객사 지하 회의실에서 3시간 동안 브리핑과 회의를 하면서, 자꾸만 달아나는 정신머리와 흐려지는 집중력에 '도망가고싶다'가 가슴팍 가득 새겨졌다. 알고보니 디지털 광고 에이전시 업계 1위에, 작년엔 코스닥 상장까지 한 광고대행사의 국장님은 3시간 동안 흐트러지지 않은 톤과 어조로 업계 탑티어의 AI 광고 기술과 디지털 마케팅의 정수를 나에게 전수하고 계시는데, 내 머릿속엔 이거 끝나면 '오늘 저녁엔 애들 또 뭘 해먹이나'가 떠오르고 그 생각이 들킬까봐 노트북 자판에 국장님 말씀을 열심히 두드려댔다.
지금도, 영문 자료를 수정하면서 '주님, 살려주이소'를 외치다가 나 아니면 누가 3일만에 220페이지짜리 최첨단 디지털 광고 기술을 영어로 PT할 수 있을까, 그것도 회사 대표의 마음으로, 라며 국뽕아닌 '자뽕'을 열심히 주입하고 있다. '내가 이걸 왜 한다고 했을까', '유튜브 숏츠만 보는 도파민 중독 뇌로 뭘 한다고'를 몰아내고 이렇게든 저렇게든 일을 할 기회가 주어졌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로 대체하려고 한다.
'자뽕' 주입의 일환으로, 터져버릴 것 같은 머릿 속을 정리해보고자 '제주 물미역' 자아를 소환해본다. 나노 단위의 움직임도 없는 극한의 휴식, 멈춤의 상태도, 어마어마한 정보를 머릿속에 밀어넣는 극한의 일모드도 사실 같은 선상에 있다. 잘 쉴 수 있어야, 일을 잘 할 수 있다. 나는 물미역도 될 수 있고, 영어 프리젠터도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지나고 나면,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었단 걸 곧 깨닫게 되겠지.
그래도, 오늘 저녁에 둘째 친구가 집에 놀러와서 저녁밥 해 주기로 했는데, 빨리 PT수정을 끝내야지, 스파게티 소스 사러 갈 수 있다... 빨리.... 빨리...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