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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ire Kim Jun 21. 2019

나를 키우는 일기, 육아일기

육아일기 (育我日記)


내가 둘째를 임신했다고 했을 때, 내 주변 친한 지인들 열명 중 아홉명의 반응은 딱 이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첫째 하나 키우는 것도 힘들다고 버겁다고 늘 죽는 소리 해댔으니당연한 반응이었다.

아마도 내 지인들은 내가 아이 하나만 낳고 주구장창 부르짖던 ‘커리어 계발’에 더 집중할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 중 몇 명은 직설적으로 말했다. 회사를 다니는 것도 아니고 프리랜서로 둘째를 가지면 일은 이제 포기하는 거냐고. 그 말에는 프리랜서니까 일을 그만 두는게 더 쉬울 수도 있겠다는 뉘앙스도 깔려있는 듯했다.


하지만, 첫째를 가졌을 때도, 둘째를 계획했을 때도 난 단 한번도 일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시간을 자유롭게 쓰는 프리랜서라서 아이 낳고 키우기가 더 ‘용이’할 거라 생각하고 둘째까지 감행한 것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프리랜서 워킹맘이거나 직장에 다니는 워킹맘이거나 아니면 전업 주부이거나 아이 낳고 키우기 어려운 것은 다 똑같은 듯 하다.


첫째가 5살이 될 때까지, 그리고 동시에 둘째가 3살이 될 때까지 누군가가 나에게 세상에서 제일 못하는 게 뭐냐고 물으면 0.0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나는 ‘육아’라고 답했을 것이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 나는 늘 내가 잘하는 것만 선택하며 살았다. 수학이나 과학을 너무 못해서 외국어고등학교를 갔다고 하면 누군가 돌을 던질지도 모르겠지만, 중3때 나는 외국어고등학교를 가면 수학을 못해도 될 거라 생각했다. 그때까지 특출하게 잘하던 영어를 계속 잘해야 ‘성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언어,영어만 특별히 잘해도 내가 가고 싶은 대학에 쉽게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순진하게 믿고 집 근처 있던 외국어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는 나머지 3년을 수리탐구I, II는 하위 10%, 언어, 외국어는 상위 1%의 꼬리표를 달고 가슴 앓이를 하며 지냈다. 나의 수학공포증은 2000년 대입 수능에서 답을 밀려쓰고 재수생이라는 화려한 타이틀로 마무리 되었지만 그 뒤로도 나는 여차저차, 어찌저찌 영어만 잘하고도 밥벌이를 하며, 그것도 ‘국제협력’이라는 소위 있어보이는 분야에서 끈질기게 살아 남았다. 첫째를 낳기 전까지, ‘노력으로 못 이룰 것은 없다’,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는 성공한다. 시간이 걸릴뿐’ 이런 류의 좌우명이 먹히는 시절을 꾸려가며 살았다. 


그런데, 육아는  도망갈 곳이 없었다.


해도해도 나랑 안맞고, 너무너무 못하는 것 같고, 앞으로도 도저히 잘할 것 같지가 않은데, 이걸 그만두고 원래 잘하던 것만 인정해주는 곳으로 ‘이직’을 할 수가 없었다. 특히 아이가 육아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나를 꿰뚫고 있는 것 같아 그 죄책감에 첫째가 3살 될 때까지 너무나 괴로웠다.

 

첫째 아이는 아주 예민하고 섬세한 기질을 타고 났는데 나는 아이가 그런 감정을 헤아려 달라고 요구할 때마다 내 안에 똑같은 욕구를 외면 당한채 혼자 그 시간을 감내해야했던 나 자신과 마주해야 했다. 그런데 내 안에 못다 자란 어린 아이를 딸 아이를 통해 다시 맞닥뜨리는게 얼마나 부대꼈던지,  첫째의 그런 기질과 정서를 받아주기가 너무나 버거웠다.


내 안의 해결되지 못한 정서적인 문제가 아이에게 전가되는게 너무나 미안했지만 그 죄책감과 별개로 결국 나는 품이 넓은 엄마가 되어주지 못했다. 세상에 완벽한 부모는 없다고, 오직 노력하는 부모가 있을 뿐이라고 누군가 해준 말을 붙들고 버티긴 했지만 둘째가 태어나면서 첫째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고 거의 1년간 매일 밤 새벽 2시부터 일어나 2~3시간씩 악을 쓰며 울어댔다. 그 덕에 첫째와 나는 함께 상담도 무던히 받으러 다녔고, 상담 선생님과의 시간을 통해 육아의 돌파구를 찾는다기보단, 지금껏 앞을 향해 달리기만 했던 내 인생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엄마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이전에 오롯이 ‘나’란 인간을 이해하고 헤아려 보는 기회였다.


그렇게 상담을 받는 동안 하루에 한번씩 한 줄 일기 라도 적기로 했는데, 명목은 나름 육아일기였다. 내 블로그 한 구석에 비공개로 폴더를 만들고 육아퇴근 (아이들 다 재운 후)후 몇 줄씩 내 감정을 끼적이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아이를 기르는 기록, 육아(育兒)일기가 아니라, 育我 ‘나’를 기르는 기록이 되어 있었다. 둘째가 3살이 될 때까지 전쟁같은 하루를 쳐내느라 일기가 ‘주기’가 되고 ‘월기’가 되고...심지어 ‘분기’에 끄적인적도 있었지만 ‘힘들어 죽겠다’고 원색적인 언어로 잔뜩 써놓은 기록에 엄마인 나는 분명히 자라고 있었다. 악전고투였지만 지나고 보니 하루에 1mm 씩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결국, 아이를 키우는 것은 ‘나'를 키우는 것이다.


참을성 없고 순식간에 ‘욱'하며,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아이가 혼자 다 먹겠다고 하면 진심으로 서운해서 삐지는,  아직도 덜 자라고 여물지 못해서 ‘어른되기'를 헤매고 있는 나 자신을 죽을 각오로 키우는 것이다.

첫째가 6살 둘째가 4살이 된 지금에서야, 지금까지 내가 아이를 위해 나의 커리어를 희생하며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살았다는 어줍잖은 피해의식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물론 아이를 낳고 키우는 데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무조건 ‘시간이 흘러야’만 해결되는 문제들이다. 제왕절개로 낳았는데 수술한 다음날 행사를 하러 뛰쳐나갈 순 없지 않은가. 지난 10년간 프리랜서라는 이름을 달고,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고 딸을 둘 낳고 키우는 동안 “정말 내가 원해서 한 일”이 아닌 경우는 없었다.

임신 기간 동안 몇 번 기업에서 영어 프리젠테이션을 대행 해 줄 수 있냐고 제의를 받은적이 있었는데, 상대가 나에게서 임신 8개월이란 말을 듣자마자 ‘다음에 연락드리겠습니다’가 된 사례가 좀 아쉬울 뿐.


물리적으로 도저히 행사 MC를 할 수 없을 것 같은 둘째 출산 3주차에도 나는 국제 금융 컨퍼런스를 진행하러 뛰쳐나갔다. 심히 걱정스런 표정으로 만류하는 남편에게 ‘프리랜서는 일을 한 번 거절하면 다신 일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비장한 말을 남기고 행사장 호텔에 새벽 7시반에 도착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5시반까지 이어지는 컨퍼런스라 그날 하루는 모유 수유를 할 수도 없었다. 멋드러지게 마블링 된 대리석 바닥에 고급 비데의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는 그 화려한 호텔의 화장실에서 나는 극심한 변비(첫째 때 이미 찾아온 치질이 재발했다)와 가슴의 통증 사이에서 정신 줄을 부여잡으러 악전 고투했다.


결국 불어난 가슴을 부여잡고 핏빛으로 가득 찬 변기 물을 내리며 속으로  ‘이건 미친 짓, 정말 미친 짓’이라며 몇 번을 되뇌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내가 ‘좋아서’선택한 것이다. 그 날, 행사장 화장실에서 겪었던 난리부르스와 별개로, 컨퍼런스가 다 끝나고 일본 IFC(World Bank 산하 국제금융기구, International Finance Center) 관계자(행사 주최자)가 너무나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순간 똑 같은 상황이 또 벌어진다면 난 일을 선택했을 거란 생각을 하며 뿌듯해했다.


나는 일 욕심 못지 않게,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은 열망도 컸다. 그래서 한동안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그리고 업계에서 완전히 잊혀질 수도 있다는 공포스러운 상황을 받아들이고 아이를 둘이나 낳고 기르는 중이다. 그리고 ‘엄마’로서의 나 자신도 기르는 중이다.


여전히 세상에서 제일 못하는 것, 1번에 ‘육아’를 적어 넣겠지만 ‘이럴 줄 몰랐어요’식의 변명은 하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나 자신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무엇을 원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엄마(아빠)가 되길 바라거나, 엄마(아빠)가 되는 준비를 하고 있거나, 이미 전투 육아중 이라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하지만 아무도 해주지 않았던 말을 해주고 싶다.


‘육아’는 ‘나’를 기르는 일이라고.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낳고 기르면서 지금껏 본적, 들은적, 생각해본적 없었던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될 거라고.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오로지 우는 것 밖에 없는 핏덩이를 사람 노릇할 수 있게 기르는 것뿐만 아니라 내 안에 아직 덜 자란 ‘아이’가 하루 아침에 ‘엄마’(아빠)란 커다란 옷을 입고 어찌해야 할 바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자신을 오롯이 마주하게 될 거라고. 그래서 가끔 ‘괴물’이 되기도 한다고. ‘괴물’이 된 자신과 마주하면 여태껏 사회적 가면을 쓰고 잘 살았다고 믿었던 ‘어른’이 죄책감과 황당함에 미쳐 버릴 것 같단 생각을 매일 하게 된다고.


프리랜서로 사는 것은 전쟁이다.


직장인, 회사원으로 사는 것도 전쟁이다.


육아는 더 전쟁이다. (덜 자란 ‘나’도 키워야 하니 1+1)


일도, 육아도 끝을 알고 덤 빌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쟁’에 뛰어 든 사람이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선택이었다면(100%가 아니더라도), 그 선택과 엉겨 붙어 어떻게든 살아가게 된다.  절대로 끝날 것 같지 않던 진통도 수술실에 들어가는 순간 끝이 나고(수술은 회복이 더 아프지만) 3년을 매일 밤 내리 울던 아이도 4년이 지나니 통잠을 자기 시작했다. 일이 다 끊어졌다고 느껴졌던 순간에, 유투브가 아마존이, 구글이 플랫폼에 나를 알릴 수 있는 옵션을 제공했다.


상황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엄마(아빠)노릇에 지쳤다면 정말 한 번 더 이 말을 해주고 싶다. 감히 말하건데, 아이를 키우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 일 거라고. 나의 분신 같은 아이를 기르는 것도, 나 자신을 키우는 것도 ‘원래’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그래서 괴물이 되었든, 잠 못 잔 좀비가 되었든 지나간다고, 어른이 되는 것도, 엄마(아빠)가 되는 것도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라고.  


다 놓지 않고 그 자리에서 ‘버티기’만 해도 어제 보단 나아지는 거라고.


평생 잘하는 것만 ‘더 잘할 수 ‘있는 환경을 찾아 살던 나도 6년째 세상에서 제일 못하는 일을 부여잡고 ‘버티기’ 신공으로 살고 있다.


프리랜서이든, 직장맘이든 일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모든 이들에게, 일도 육아도 내가 ‘좋아서’ 할 수 있는 시간이 반드시 온다고, 빨리 찾아 오든 늦게 찾아 오든 그 기회가 찾아 왔을 때, 내가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선명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무엇을 선택하든 자신이 옳은 결정을 하는데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은 결국 ‘자신을 가장 잘 아는’것이다. 결혼, 육아, 일 그리고 자아 실현을 이뤄가는 과정에서 무던히도 ‘헤매야’하는데 그 헤매기가 여간 어렵고 고통스러운게 아니지만 최소한 그 길의 끝에서 선명해진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조금 더 가벼워지고, 조금 더 투명해질 자신을 꿈꾸며 오늘도 아이와 나 자신을 어르고 달래본다.


내가 한 결정이 옳은 결정이 되도록.


나 자신만 그 가치를 알게 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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