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 멘탈관리
지난 10년간 프리랜서로 살면서 겪은 나의 멘탈 상태를 가장 정확히 설명하는 말이다.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프리랜서로 독립한지 1년 쯤 됐을까, 한창 국제행사 MC로 활동하면서 여기저기 오디션을 보고, 프로필을 넣고 그래서 인지도를 막 쌓으려고 할 때, 한 정부기관에서 주최하는 국제행사 개회식 MC 후보로 지원한 상태였다. 그런데 PCO (Professional Convention Organizer, 행사 광고 대행사)담당자에게서 온 답변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주최측인 기관의 담당자가 내 이름을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주최 기관은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내도 이전에 관련된 일을 같이 했거나, 몇 다리 걸쳐 알거나 할 만한 곳이 아니었다. 나에게는 정말 한번도 인연이 닿지 않은 곳이었는데, 나를 어디에서 알았는지, 동명이인을 착각한 건 아닌지, 아니면 정말 누군가가 나를 해코지한건지 너무나 억울해서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으나 어디다 물어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 행사 직전 다른 행사를 같이하면서 나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나를 꼭 추천하고 싶어했던 대행사 담당자에게 너무 민망해서 뭐라고 반응을 해야할 지도 모를 상황이 되버렸다. 나를 추천한 담당자가 오히려 곤란한 상황이 됐으니 주최측 과의 관계는 차치하더라도 대행사와의 관계도 엉망이 돼버렸다. 그 뒤로 이 대행사로부터 행사 의뢰 연락이 없어진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프리랜서로 독립하기 직전 누구나 들어가고 싶어하는 국제기구를 때려치고, 꿈에 날개를 달아 훨훨 날아보겠다고 야심차게 출발했는데 출발과 동시에 내리막길을 걸어야 할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다. 자다가 코베인 듯한 이 일의 트라우마는 사실 지금까지도 해결이 안되었다.
이 때 이후로 나는 극도로 다른 사람의 평가에 민감해지고, 내가 일한 결과의 피드백이 두려워지고,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든지 좋은 평가를 주어도 진심으로 하는 말일까 의심하는 의심병까지 생겼었다. 그리고 내가 무심코 하는 내 말 한마디에 상대가 기분나빠질까봐 한마디 내뱉고 나서 계속 눈치를 보고, 어쩌다 업무관련 미팅을 하고 온 날엔, 자기전에 내가 오늘 했던 모든 말을 복기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멘탈이 ‘연두부'의 질감이 되서는 누가 내 앞에서 한숨만 쉬어도 그 얕은 ‘숨'기운에 부르르 떨게 되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누가 뭐라해도 내 갈 길 간다'의 뚝심은 자신이 가는 길에 대한 확신과 정당성이 받쳐줄 때야 가능한데 안그래도 불안한 프리랜서 신분에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내가 내린 결정에 대해 회의가 찾아온다. 그래서 ‘제 발이 저리는' 상황이 돼서 누군가 조금만 부정적인 반응이나 피드백을 보이면 내 안의 확신이 없는 만큼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내가 하는 일은 눈에 보이는 재화를 공급하는 것도 아니고, 순전히 나의 ‘재능'을 기반으로 한 철저한 서비스업인지라 행사를 주최하고 운영하는 주체들,고객과의 관계 유지가 아주 중요하다. 이미지로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지라 ‘전문성을 유지하면서 상냥하고 친절한 프로페셔널’이 되기 위해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만가지 생각을 할 때가 많은 전형적인 서비스업의 스트레스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내 일에 대한 열정과 애착이 다시 피어오르면 갑자기 머릿속에서 온갖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근자감이 용솟음치면서 당장 내일부터 일거리가 쏟아져 들어올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긴 시간 우울과 좌절 모드였다가도 지금부터 모든 걸 다 완벽하게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은 알 수 없는 에너지가 마구 솟아나다가 생각한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이전 보다 더 심한 무기력증에 빠지게 된다.
조직에 속해 있을 때는 굳이 내가 내 자신을 증명하지 않아도, 조직의 간판이 나의 정체성이 되어준다. 그 간판 때문에 ‘존엄하지 못한' 자본주의의 노예로 살고 있다는 자각을 하고 프리랜서가 되었는데 막상 자유계약자 신분이 되고 보니 그 간판이 아쉬울 때가 한두번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나도 이 멘탈 싸움에서 버티지 못하고 프리랜서 3년차 정도까지, 더 정확히 말하면 아이를 낳기전까지 정부기관 같은 곳에 파트타임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알아봤었다. 언제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쩌다 한번 하는 행사 진행이라도 포기할 수 는 없고, 경제활동은 해야겠으니 궁여지책으로 파트타임을 뛰려고 했었다. 그러나 내 입맞에 맞는 회사나 기관을 찾는게 쉽지 않았다. 결국 그 연두부 멘탈로 십년을 버티며 아직도 자유계약자 신분으로 살고 있다.
지난 십년간, 도를 닦는 심정으로 프리랜서라는 신분을 지켜오고 있지만 솔직히 앞으로도 부정적인 피드백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자신은 없다. 차라리 내 성향상 ‘고객이 만족할 때까지’ 완벽하게 일을 더 잘하도록 자신을 채찍질 하는게 더 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이 부정적인 피드백보다 더 공포스러운 상황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답보(status quo) 상태이다. 단순히 일을 아예 못하게 된 것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새로운 프로젝트를 따내지 못할 때, 시장에서 도태되는게 눈에 보일 때 지금까지 해온 것들을 다 부정하고 싶을 만큼 자괴감과 좌절감에 빠지게 된다. 자유계약자 신분으로 감나무 밑에 서서 입을 벌리고 있으면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 할만한 맛난 감은 안 떨어지고, 불안'감', 자괴'감', 자책'감',좌절'감', 공포'감',우울'감'등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부정적인 ‘감'만 떨어지는 느낌이다.
그러나 십년간, 부정적인 '감'만 주운게 아니라 요즘 들어서 새로이 깨달은 것은 '될 일은 되고, 안될 일은 안된다'는 그 흔하디 흔한 명언이다. 이력서, 포트폴리오를 보내달라고 재촉하는 '일면식도 없는' 온라인 고객들에게아무런 답변이 없거나, 발탁 되지 않았다(라고 답변을 주는 경우도 거의 없음, 마냥 기다리지 않게 답변이라도 준다면 정말 일을 따내고 못따내고를 떠나서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듬)란 결과를 받아들게 되면, 처음엔 내가 피드백을 늦게줘서 일을 못 따낸 것이 아닐까, 나의 어떤 말투가 마음에 안드셨을까 별의별 자책을 다했었다. 그런데, 행사 2주전쯤 연락이 와서 자신도 잘 모르는 업계 현황이나 분위기등을 마구 물어보는 '담당자'분들을 접하다 보니 '나를 뽑기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도 어디선가 떠밀려 맡게 된 일을 '해쳐내기'위한 정보수집 단계란 걸 알게 될 때가 있었다. 그런 경우는 내 잘못이 아닌데도 (명명백백히) 늘 일이 절실한 나는 (ㅠ_ㅠ)나를 탓하는게 세상에서 가장 쉬운일이라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말 될 일은, 담당자가 '무엇이 필요하고', '언제까지 필요하고', '어떻게 도와줬음 좋겠다'가 이미 확고하게 정립이 된 상태다. 그래서, 시간에 쫓길 수 는 있지만 무엇이 필요하고 불필요한지에 대한 개념은 명확히 서있다. 그리고, 준비가 된 분들은 매너도 좋으시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라 확신이 있어서인지, 자신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가 깔려있고 더불어 커뮤니케이션 방법이 거칠지 않다. 그래서, 정말 200%나의 잘못이 아니란 생각이 들 때는, 그걸 털어버릴 수 있는 여유도 좀 생겼다. 그나마 이 깨달음도 10년간 연두부 멘탈로 생존하면서 수없이 많은 밤을 가슴앓이를 하며 얻은것이긴 하다만...
그래서 도 닦는 멘탈관리 말고, 내가 지난 십년간 찾은 멘탈관리 방법중 가장 효과적인 것은 ‘일상의 루틴'을 지켜내는 것이다.
프리랜서이지만 회사 출근하듯이 ‘작업장'으로 출근한다. 집의 옆방이 되었든 공유오피스의 한켠이 되었든, 지하 녹음실이 되었든 나의 ‘열정 전투기'를 띄울 수 있는 관제탑 같은 일터로 출근한다.
그리고 아침마다 제일 먼저 ‘닭장’ 문을 연다.
닭장 1호, 메일함
닭장 2호, 유튜브,
닭장 3호, 네이버 블로그, 내 페이스북 페이지
온라인 공간이지만, 나를 홍보하고 알리는 채널이 내게 달걀(일)을 가져다 주는 닭장이다. 어느 닭장에서 알을 낳았는지 열어보고, 달걀이 들어 있으면 조심스럽게, 하지만 들뜬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알을 낳지 못했더라도(일과 연관된 피드백이 없더라도) 다음을 위해 닭장을 쓸고 닦는다.(댓글을 관리하거나, 새 글을 올리거나 자료를 업데이트한다.)
그리고 오전에 제일 하기 싫은 일, 머리를 쥐어짜야해서 미뤄왔던 일, 까다로운 고객에게 안부 전화하는 일 등을 해치운다. 그래야 오후에 생긴 돌발상황 때문에 오늘 꼭 해야할 일을 못하게 되는 일이 없다. 그리고 하루를 ‘생산적'으로 보냈다는 자기만족감도 챙길 수 있다. 프리랜서에겐 이 자기만족감이 엄청나게 중요하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때,
프로젝트를 따내지 못했을 때,
열심히 공을 들인 관계에서 아무런 소득없이 끝날 때,
그리고 제일 공포스러운, ‘아무런 일 도 일어나지 않을 때', 사회에서 내가 잊혀진다고 느껴질 때,
그럴때마다 회복할 수 있도록 잡아주는 시스템과 루틴이 엄청나게 중요하다.
열정도, 자존심도, 희열도, 성취감도, 자존감도, 다 의미 없어질때 그럴때마다 글을 한번 더 남기고, 샘플을 다듬고, 나의 포트폴리오를 업데이트하고 잘 나온 사진을 고르고, 지금 들으면 어색하거나 잡음이 들리는 샘플을 수정하는 등 사소하지만, ‘더 나은 나'를 세상 어딘 가에 뿌리는 이 루틴이 실제로 나에게 새로운 일을 가져다주고 일에 대한 새로운 영감을 일깨워준다.
아무도 보지 않고, 누구도 그 가치를 알아주지 않지만 1년만이라도 지킬 수 있다면 그 사소한 습관이 변덕스러운 노동시장과 요동 치는 멘탈사이에서 ‘나를 존재하게 해주는' 가장 강력한 안전망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진: 올해, 5월쯤 우박, 비바람 쏟아지는 압구정에서 국제세미나 참석하러 가는 길에 집나간 정신, 멘탈 잡는 장면 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