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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철학자의 여행법> 리뷰

여행에 대해 숙고해볼 수 있는 시간

우리는 여행을 떠나기 전엔 새로운 곳에 대해 기대하고, 비행기에 오른다. 여행이 끝나면 다음 여행을 꿈꾼다. 이것이 보통의 여행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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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여행법>의 저자 미셸 옹프레는 여행의 여정을 일곱 단계로 쪼갠다. 여행을 갈망하는 '인트라다(Intrada)'에서부터 목적지를 정하고 욕망을 부풀리는 '전에(Avant)', 여행지로 향하는 '사이에1(Entre-Deux1)', 여행 중인 '동안에(Pendant)', 여행에서 돌아오는 시간인 '사이에2(Entre-Deux-2)', 다녀온 후인 '후에(Apr's)', 마지막으로 다음 여행을 꿈꾸는 '코다(Coda)'로 나눈다.


책은 여행자를 유목민(혹은 방랑자, 카인)으로 칭한다. 여행자들은 자유롭고 돌발적 상황이나 행동에 대한 욕망이 강하며 자율성을 강조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 스스로를 가두고 통제하던 것은 '족쇄'를 채우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여행자들에게 있어 방랑은 자유로운 본능과 같다. 여행하지 않는 자는 정착민(아벨)로 분류된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기본 철학서를 살펴보면 사람들 각자는 물, 흙, 공기에 대한 열정을 지니고 있으며, 그 열정의 불꽃이 여행자의 몸 속을 돌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활기 넘치는 유목민들은 이러한 열정을 통해서 서로 뭉치고 생기를 얻고 영감을 한데 모은다. (26쪽)

저자는 여행의 시작이 '독서'에 있다고 말한다.


독서는 일종의 시작 의식과도 같다(…) 아무런 사전 지식도 없는 장소에 도착하게 되면, 우리는 존재론적인 공허함을 느낄 수도 있다. 여행지에서 우리는 단지 이미 가지고 있던 것만을 발견할 수 있다. 여행자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여행은 공허해진다. 따라서 풍부한 준비는 뛰어난 여행을 만든다. (33쪽)


나는 위 문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사전에 여행지에 대해 학습하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경우와 확실한 질적 차이를 낳는다. 나 역시 여행 전에는 여행지에 대한 역사적 의미, 관광 명소들과 그곳의 가치들에 대해 학습하고 가는 편이다. 단순히 장소들을 나열한 가이드북보다는, 장소에 대해 깊이 있게 파고드는 편이다. 이러한 친절한 설명이 기록된 책은 선경험에 대한 도구이다.


책도 종류가 다양하다. 개중에서도 저자는 여행지에 대한 상상력을 높일 수 있는 시집을 추천한다. 함축적이지만 상징적인 의미가 다분한 시를 읽으면 사색과 상상의 여지가 더 커진다는 의미에서 시 읽기를 추천한 것. 아무리 조악한 글일지라도 사진이나 영상을 먼저 접하기보다는 텍스트를 통해 여행을 앞서 경험해볼 것을 강조한다. 우리도 경험 상 잘 알고 있다. 사진이나 영상은 왜곡성을 지니고 있는데다, 편집 등의 가공으로 전혀 다른 결과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더불어, 시각적인 것들은 고정관념을 유발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아직 접하지 못한 곳들을 직접 보고 느끼기 위해 떠나는 것이 여행일진대, 사진이나 영상은 여행지에 대한 이미지를 한정 지을 수 있다는 면에서 위험 요소가 있다.


여행의 순수함을 회복하려면,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확인할 목적으로 어느 지역을 찾아가는 여행은 피해야 할 것이다. (…) 순수함이란 우리가 읽고 배우고 들은 것을 잊어버린 것을 전제로 한다. 단지 부정하고 축소하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장소의 볼거리와 자아 사이의 관계를 끼어들 수 있는 것을 모두 따로 떼어 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여행을 하면서 우리는 원시적 난폭함을 간직하고 있는 장소에 대해 느끼는 감정들을 마치 신비로운 이교도들의 봉헌물을 대하듯이 수동적이고 관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78, 79쪽)

우리가 여행지로 향할 때는 자유와 순수함을 안고 떠나야 할 것이다. 여행은 기존에 잘 알고 있던 것을 확인하러 가기 위한 활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나의 평소 생각을 잘 정리해준 글귀를 만나 기뻤던 순간도 있었다.

관광객은 비교하고, 여행자는 분석한다. 관광객은 다른 문명의 문턱에 머무르면서 단지 문화를 스쳐 지나가고 그 거품만을 맛보면서 멀리 떨어진 채 그 배경을 이해하는 것에 만족한다. 여전히 그 자신의 뿌리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는 구경꾼으로서 말이다. 여행자는 웃고 울고 판단하고 자책하고 용서하고 배척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고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은 채, 언제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싶어 하는 관객의 입장에서 미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려고 애쓴다. 관광객은 비교학자라고 할 수 있으며, 여행자는 해부학자라고 할 수 있다. (77, 78쪽)

이왕 이국적인 곳으로 향하기를 결정했다면 관광객보다는 여행자가 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책에서 특히 강조되는 단어는 '사이에'다(무려 두 번에 걸쳐 등장한다). 저자는 '사이'를 '새로운 공동체'라 명명한다. 언제 해체될지 모르는 운명에 처해 있는 무리들을 모아서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 '사이'의 새로운 해석이다. 한편, 이 '사이'는 무가치한 말들이 오가기도 하고 좌우대칭을 이루는 교차의 공간이라고 정리하기도 한다. 밀썰물처럼 사람들이 오가고, 누군가의 목적지가 다른 이에겐 출발지가 되기도 한다. 이 묘한 '사이'는 동전의 양면같이 전혀 다르기도 하지만 또 하나로 이어지는 원형의 공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편, 저자가 추천하는 여행자 단위와 형태는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우정 여행이다. 연인끼리의 여행은 자칫 위험할 수 있으나, 우정은 확실히 돈독해진다고 말한다. 단, 둘이 함께하는 여행은 상대방을 '스스로 선택'했는지 여부에 따라 만족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이 주장에 대해서도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나와 다른 친구 한 명이 함께하는, '둘만의 우정 여행'을 선호하는 나는(물론, 혼자 떠나는 것도 좋아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을 느끼고, 여행이 끝난 후 각자의 집에 돌아갈 때는 아쉬운 동시에 다음 우정 여행을 기리면서 단맛을 취한다.


여행이 끝난 후 우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저자는 여행만큼이나 '집의 가치'도 소중하다고 말한다. '되돌아오는 것은 더 이상 머무르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이고, 이미 획득하고 결정된 것으로 보이는 것에 대해 새로운 확신이나 추가적인 유효성을 인정해 주는 것이다. 이미 끝난 여행에서 집은 하나의 증거가 된다. 뿌리는 꽃이 만발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그 의미를 가지게 된다. 바로 이때 식물이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단지 땅속에 파묻힌 상태 혹은 단지 잎, 꽃, 열매로만 이루어진 상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뿌리를 내리고 정착할 수 있을 때 유랑 생활은 정당화될 수 있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127, 128쪽)

일이 있어야 휴식의 가치를 알고,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의 의미를 인지하게 된다. 우리가 여행에 대한 욕망을 갖게 되는 이유가 정착할 수 있는 집이 있기 때문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여행의 의미는 행하는 동안에만 그치지 않는다. 어쩌면 여행을 더 빛나게 만들어주는 시기는 여행 이후라고 봐도 좋다. 여행을 다녀온 후 그 경험을 타인에게 이야기하면서 회상하고, 글로 적음으로써 가치를 되새길 수 있다.


사실, 경험은 말라르메가 말하는 오래된 꿈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현실을 글로 옮기고, 경험을 책 속에 풀어놓는다. 세상에 대한 산문, 자아에 대한 글쓰기, 기억을 돕는 수사학, 지리에 대한 시는 서로 뒤섞여서 화학적으로 순수한 독창적 혼합물을 만들어 낸다. 대리석 속에 잠들어 있던 기억, 시 속에 감춰져 있던 기억, 청동 속에 흐르고 있던 기억을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이다. 경험은 오직 글로 쓰일 경우에만 그 전체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또 다른 수단들-수채화, 데생, 사진 등-은 현실 전체가 아닌 다양한 모습들 중 하나의 단면(색, 선, 이미지)만을 포착하여 나타내기 때문에 경쟁 상대가 되지 않는다. (…) 우리가 거쳐 온 길은 사물을 단어로, 삶을 글로, 여행을 동사로, 자아를 자아로 이끌고 간다. 끝없이 펼쳐진 세상에 형식을 부여하는 작업을 통해서, 기억의 편린들은 빛나는 추억으로 변신한다. (139, 140쪽)

결국, 여행의 기억을 빛나는 추억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글이다.


<철학자의 여행법>에는 저자 외에도 다양한 철학자들의 말과 글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여행지를 소개하는 가이드북이 아니다. 여행의 의미와 가치를 드높여줄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인문서에 가깝다. 여행에 대해 숙고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은 분들께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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