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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김영하 <여행의 이유>

우리는 떠날 수밖에 없는 호모 비아토르

여행. 이제는 많은 이들이 향유하는 활동이다. 그래서인지 여행에 대한 공유거리가 늘어나고 있다. 물론, 여행을 떠나는 목적과 취향, 형태는 개인마다 다르다. 쉼, 일탈, 학습, 친목 도모 등을 위해 떠나고 누군가는 어쩔 수 없이, 피동적으로 여행길에 올라야 하는 경우도 있다. 홀로 떠나는 것을 좋아하거나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을 선호하는 이들도 있다.


<여행의 이유> 바캉스 에디션

여행을 소재로 다룬 도서 역시 예부터 지금까지 상당수 등장했다. 내겐 현자 같이 느껴지는 이들도 여행(떠남)을 행했고, 그로 하여금 무언가를 깨달아왔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니어링 부부(스코트, 헬렌), 루소, 니체 등이 있다. 형태는 달랐지만 살던 곳에서 이동해 새로움을 경험하는 것을 즐겼던 인물들이다.


<여행의 이유>의 저자 김영하 역시 여행을 좋아하고 여행을 다룬 책을 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꽤 오래전부터 여행에 대해 쓰고 싶었다. 여행은 나에게 무엇이었나. 무엇이었기에 그렇게 꾸준히 다녔던 것인가, 인간들은 왜 여행을 하는가, 같은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답을 구하고 싶었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그러니까 내가 들인 시간과 노력을 기준으로 보면, 나는 그 무엇보다 우선 작가였고, 그다음으로는 역시 여행자였다. 글쓰기와 여행을 가장 많이, 열심히 해왔기 때문이다.' - p. 212


김영하 뿐만 아니라 우리의 대부분은 여행을 좋아한다(물론,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책의 제목처럼 인류에겐 여행을 하는 '이유가 존재'했다.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가브리엘 마르셀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즉 '여행하는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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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오래전부터 인생이 여행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어디에선가 오고, 여러 가지 일을 겪고, 결국은 떠난다. 우리는 극단적으로 취약한 상태로 지구라는 별에 도착한다. 그러므로, 인생이라는 여행은 먼저 도착한 이들의 어마어마한 환대에 의해서만 겨우 시작될 수 있다. 신생아는 자기가 도착한 나라의 말을 모른다. 부모와 친척들이 참을성을 가지고 몇 년을 도와야 비로소 기초적인 언어를 익힐 수 있다. 부모는 아이가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가 될 때까지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먹여주고 재워준다. 충분히 성장하면 인간은 지구에 새로 도착한 여행자들을 환대함으로써 자신이 받은 것을 갚는다.' - p. 138


어쩌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여행을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디딘 것부터가 여행과 닮아있다. 우리는 새로운 여행지에 대해 경험하기 이전에는 알 수 없다. 무언가를 경험하는 우리의 인생 자체가 여행의 구조와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모호한 감정이 소설 속 심리 묘사를 통해 명확해지듯, 우리의 여행 경험도 타자의 시각과 언어를 통해 좀 더 명료해진다. 세계는 엄연히 저기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세계와 우리 사이에는 그것을 매개할 언어가 필요하다. 내가 내 발로 한 여행만이 진짜 여행이 아닌 이유다.' - p. 117


그렇다고 우리가 직접 경험한 것만이 여행이라고는 볼 수 없다. 인정한다. 간접 경험을 위해 우리는 책을 읽고 영화와 미술 작품들을 감상한다. 이 활동들을 여행이라 규정지을 수는 없지만 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여행에 대한 욕망을 갖게 해주기 때문에 직접 경험 이전의 프롤로그 정도로 볼 수 있겠다.


앞서 언급했듯 여행의 목적은 개인마다 다르다. 여러분들은 어떤 이유로 여행을 결심하는가. 나는 일상의 염증, 잡념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여행을 결심하곤 한다. 늘 생활하던 곳에서부터 멀어지는 것만으로도 일상의 무게를 덜 수 있다.


'집은 의무의 공간이다. 언제나 해야 할 일들이 눈에 띈다. 설거지, 빨래, 청소 같은 즉각 처리 가능한 일도 있고, 큰맘 먹고 언젠가 해치워야 할 해묵은 숙제들도 있다. 집은 일터이기도 하다. 나는 컴퓨터 모니터만 봐도 마음이 무거워진다. 아니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들만 봐도 그렇다. 책들은 내가 언젠가는 하지 않으면 안 될 일, 그러나 늘 미루고 있는 바로 그 일, 글쓰기를 떠올리게 한다. (…) 오래 살아온 집에는 상처가 있다. 지워지지 않는 벽지의 얼룩처럼 온갖 기억들이 집 여기저기에 들러붙어 있다. 가족에게 받은 고통, 내가 그들에게 주었거나, 그들로부터 들은 뼈아픈 말들은 사라지지 않고 집 구석구석에 묻어 있다. 잠깐 머무는 호텔에서 우리는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다.' - p. 63


또다른 여행의 장점은 삶의 추억을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후회할 일은 만들지를 말아야 하고, 불안한 미래는 피하는 게 상책이니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미적거리게 된다. 여행은 그런 우리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끌어내 현재로 데려다놓는다. 여행이 끝나면, 우리는 그 경험들 중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생각으로 바꿔 저장한다. 영감을 좇아 여행을 떠난 적은 없지만, 길 위의 날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 p. 82


경험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뇌는 한 번 경험한 것은 그 어떤 것도 잊지 않는다고 한다. 여행(꼭 다른 나라로 가지 않더라도)은 내게 많은 영감을 준다. 예기치 못한 것들을 경험하게 만드니까. 글쓰기를 좋아하는 나는 지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나는 글감을 찾기 위해 여행한다."


많은 곳들로 떠난 이들만이 여행자는 아니다. 지구에 발을 디딘 것만으로도 여행자라 할 수 있다. <여행의 이유>는 김영하의 여행에 대한 경험과 가치관이 담긴 산문집이다. 하지만 단순히 타인의 삶을 염탐하기 위해 이 책을 꺼내든 것은 아니다. 나를 포함한 독자들은 여행의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었을 것이다.


여행을 포함해 모든 상황을 깊고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하고 활동한다면 그 의미있지 않을까. <여행의 이유>는 여행에 대해 사색하게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꽤 괜찮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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