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
제목이 재미있었다. '가끔은'과 '격하게'라는 두 단어의 이어짐이 나를 웃게 만든 것. 오히려,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외로워야'보다 그것을 꾸며주는 단어들의 부조화가 이 책을 선택하게 된 계기였다. '가끔은 외로워야'와 '격하게 외로워야'가 지닌 의미의 간극은 상당하다(물론, 나의 생각에는). 간극이 큰 단어가 이어지니, 왠지 더 강력한 '집중력'을 지니고 있는 듯 하다. 우리는 사실, 자주 외로움을 느낀다. 하지만 그 외로움들이 격하다고는 볼 수 없다. 설사, 격하게 외로움을 겪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주' 발생한다면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 게 분명하다. 그래서 저자는, 자주는 아니지만 '절정의 외로움에 집중해보는 것도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이러한 제목을 적은 듯 하다. 물론 이 또한 나의 해석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이같은 제목의 책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저자가 '격한 외로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50세 이후, 새로운 배움을 찾아 일본에서 홀로 지낸 것을 자처한 그는 타인과 동떨어진 삶을 겪어왔다. 하지만 그것은 정신적 외로움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배우고 그 외 지적 호기심을 작품 활동을 통해 채워나가면서 즐거운 삶을 살아나간다.
결국 이 책은,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지위에 자신을 맞추느라 '진짜'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이들에게 따끔히 충고한다. 어쩌면 저자도, 타자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갇힌 사고와 관계에서 벗어나 진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로 결정하고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는 진정한 행복을 만끽하게 된 것이다.
4년 간 일본에서 홀로 지내왔던 시간 동안 분명히 외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외로운 시간이 주어졌고, 그 시간을 최대한 자기만의 것들로 채워나갔기에, 가장 생산적인 시간이었다고 말하는 그다.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거나 드높이기 위해서 '바빴던 시간'들은 오히려 더 큰 외로움과 공허를 남기게 마련이다. 오히려 외로움을 견디고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자는, 외로움을 모른다는 것이다. 외롭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 얽매임 없이 자유롭고 원활할 수 있다. 많은 책들에서 강조되어 온 '고독의 가르침'을 재확인하게 된 것이다. 어차피 인간은 외로움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이것이 숙명이라면,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문제는 받아들인 이후다. 받아들였다면, 최대한 즐겨야 할 것이다. 저자는 외로움을 자처했고, 그 혼자만의 시간에 최대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몰두했다. 최상의 결과(물론, 앞으로의 꿈들도 많다고 고백한다)를 얻었다.
우리도 혼자일 때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주어진 고독의 시간을 온전한 자신의 삶으로 채워나가야 할 것이다. 100(혹은 120)세 시대인 지금으로는, 50의 나이도 고작 절반을 걸어왔을 뿐이다. 많은 이들이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기에는 늦었다고 말할(혹은 비난) 수 있겠지만, 저자는 그것으로부터도 독립을 선언했다. 오히려, 외로움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은 것을 불행이라 말한다.
모든 인간에게는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보장받을 수 있는 사적 공간, 즉 배후 공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인간의 존엄은 이 최소한의 배후 공간이 있어야 유지된다.
교도소는 범죄에 대한 징벌로 이 배후 공간을 박탈한다.
여러 명이 좁은 방에서 함께 생활하며 화장실까지도 공유해야 한다.
사직 공간의 박탈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깨달아야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기 때문이다. - 40쪽에서
그렇다면, 그보다 젊은 우리들은 어떻게 앞날을 설계해야 할 것인가. 먼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며, 다양한 상황에 대해서도 열린 사고를 지녀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타자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외로움을 견뎌내야겠다는 확고한 태도를 갖춰야 할 것이다. 이리저리 휘둘리다가는 결국 주체성도 휘발되고 말 것이다. 훗날(사실은 훗날이 아닐 수도), 죽음 직전에 후회해봐야 소용 없다. 크든 작든, 목표하는 바를 겨냥하기 위해서는 가끔은 외로워질 필요가 있다는 걸 일깨워주는 책<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다.
이 책은 사실, 저자의 에세이에 다름 아니다. 개인의 사색을 통해 우리는 지혜로운 삶의 태도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물론, 모든 부분을 수용할 필요는 없다). 고독을 즐길 줄 알아야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행하거나 성찰 및 사색할 수 있다는 것. 나는 이 부분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현재,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외로울 수 있지만, 나는 그것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다. 좋아하는 활동을 하는 시간들은 오히려 외로움이 즐겁다. 나는 고독의 순간들을 사랑한다. 덕분에 배움거리라는 새로운 친구들을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결연한 태도가 담긴 자기고백을 옮겨본다.
그림을 공부하기로 한 것은 내 인생의 가장 훌륭한 결정이었다.
주체적 삶이란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공부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인생의 주인이 돼라!'고 무수한 자기계발서들은 한결같이 주장한다.
그러나 구체적 방법론은 제시하지 않는다.
주체적 삶이란 그렇게 주먹 불끈 쥐고 결심한다고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월급쟁이 생활을 때려치우기만 하면 바로 내 삶의 주인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큰 착각이다.
평생 추구해야 할 공부의 목표가 없음을 돈의 문제로 환원시키며 자신의 쫓기는 삶을 정당화하는 것 또한 참으로 비겁하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놓치지 않을 관심의 대상과 목표가 있어야 주체적 삶이다.
우리가 젊어서 했던 '남의 돈 따먹기 위한 공부'는 진짜 공부가 아니다.
자아실현은 공부를 통해 구체화된다.
공부야말로 가장 훌륭한 노후 대책이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다.
우리보다 앞서 고령화 사회를 겪고 있는 일본이나 다른 서구 국가들이 수없는 시행착오 끝에 내린 고령화 사회 대책은 공부다! '평생학습' 개념도 고령화 사회라는 맥락에서 나오는 거다.
그래서 요즘 서구의 실버타운은 가능한 한 대학과 같은 교육 시설 근교에 짓는다.
교육기관과 연계한 평생 학습 프로그램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 318쪽
[책 속에서]
고령화 사회의 근본 문제는 '연금'이 아니다.
은퇴한 이들의 '아이덴티티'다.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확인할 방법을 상실한 이들에게 남겨진 30여 년의 시간은 불안 그 자체다.
불안은 원래 미래가 불확실한 젊은이들의 정서다.
경험과 경륜의 노인들이 불안해하는 젊은이들을 위로할 때
한 사회는 균형을 잡으며 건강하게 버틸 수 있는 거다.
그러나 오늘날 아무런 대책 없이 수십 년을 견뎌야 하는 '젊은 노인들'이 갈수록 늘어난다. - 65쪽에서
인간이 가진 가장 아름다운 정서는 '그리움'이다.
글과 그림, 그리움의 어원은 같다. 종이에 그리면 그림이 되고, 마음에 그리면 그리움이 된다.
고마움과 감사함은 그리움의 방법론이다.
고맙고 감사한 기억이 있어야 그리움도 생기는 거다. - 94쪽에서
마주 보기는 왜 인간에게만 가능한가?
미숙아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포유류는 어미의 배 속에서 '완숙'되어 태어난다.
일단 태어나면 몇 시간 내에 자기 발로 바닥을 딛고 일어선다. 인간만 미숙아로 태어난다. 제 몸 하나 가누는 것도 수개월이 걸린다.
그러나 이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기간에 아기는 타인과 눈을 마주치고, 정서를 공유하는 능력을 배운다.
태어나면서부터 스스로 자기 몸을 가눌 수 있는 여타 포유류는 다른 존재와 눈을 마주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인간의 아기는 어쩔 수 없이 엄마와 눈을 마주쳐야 한다. 누워 꼼짝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위대한 까닭은 미숙아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측면에서든 미숙한 이들을 사랑하고 배려해야 한다.
미숙함이야말로 소통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측은지심과 의사소통은 동전의 양면이다. - 253쪽에서
시간이 내면화되자 인간 의식은 지금까지 없었던 아주 치명적 위협에 노출된다.
시간이 되어야만 먹고, 시간이 되어야만 잘 수 있게 된 것이다.
원래 인간은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는 존재였다.
그러나 이젠 전혀 졸리지 않아도 시간이 되면 자야 하고, 전혀 배고프지 않아도 시간이 되면 먹어야 한다.
비만이나 거식증 혹은 불면증은 이러한 내적 시간에 쫓겨 생기는 정신질환이다. - 261쪽에서
산책은 우울함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걷다 보면 주의가 분산되면서 우울함과 상관없는 전혀 다른 생각이 떠오른다.
걷기에 동반되는 몸의 리듬은 유쾌한 감정을 일으킨다.
즐거우면 몸을 흔들게 되지만, 몸을 흔들면 즐거워지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가 돌다돌다 마지막에 파고든 주제가 바로 이 '리듬 분석'이다.
르페브르에 따르면 몸의 리듬은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다.
걷기는 고도의 문화적 행위라는 것이다.
걷기를 가장 먼저 문화적 행위로 규정한 이는 독일 출신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었다.
그는 도시 구석구석을 헤매고 다니는 이를 가리켜 '산책자'라고 했다.
물론 동서양의 고전에서 산책은 항상 철학적 사유와 연관 지어 설명해왔다.
문제는 어디를 산책하는가다.
독일 사람들은 아주 자주 산속을 헤맸다. 이를 '방랑'이라고 했다. - 3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