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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관객모독>

확실한 개별성을 지닌 페터 한트케의 언어극

우리는 연극을 보러 가기 전, 연극에 대한 기대감에 들떠있고 혹자는 연극 감상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해 옷차림과 행동에 신경을 쓰기도 한다. 우리는 연극을 감상하는 시간 동안 '실제의 시간'을 거부한 채 '연극된 시간'에 빠져든다. 즉, 연극을 감상하는 동안에는 온전히 자신을 '잊고(혹은 잃고)' 극에 빠져든다.


흔히들 생각하는 연극(사실극)에는 메시지가 있고,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로는 배우들의 몸짓과 언어, 그리고 미장센을 장식하는 소도구들이 등장한다. 이것들이 배제된 연극은 감상을 마음먹은 관객들에겐 하나의 배신일 수 있겠다.


하지만, 이 모든 기존의 연극의 형태를 거부한 이가 있다. 바로 피터 한트케의 <관객모독>이라는 희곡이다. 그가 쓴 희곡은 제목 그대로 관객을 혼란에 빠뜨린다. 특별한 소도구나 의상을 갖추지 않은 무대와 배우들. 그 정도까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배우들은 이렇다할 형식이나 메시지를 지닌 '연기'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관객들과 공존할 뿐이지 관객들이 기대했던 사실극의 배우 역할을 하지 않는다. 


나아가 그들은 관객들을 모독하기에 이른다. 관객들에게 '욕설'을 퍼붓는가 하면, 물까지 끼얹는다. 욕과 물을 한바가지 얻어먹은 관객들은 그야말로 '모독'을 당했다고 할 수 있으나, 이 신선한 연극에 빠져든 필자와 같은 관객이라면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연극과 사랑에 빠지게 될 것이다.


책<관객모독>을 연극을 접한 후 읽게 됐다. 처음 연극을 접했을 땐 '당혹스러움' 그 자체였다. 하지만 연극이라는 형식 자체에 대해 자문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작품이기도 하다.


'왜 연극은 극화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왜 무대 위 배우들과 무대 아래(혹은 위)의 관객들은 연극에 참여할 수 없을까' '왜 우리들(배우와 관객)은 공존하면서 다른 시간 위에 있어야 하는걸까' 등 연극 자체에 대한 물음을 하는 연극이 바로 <관객모독>이다.


어쩌면, 이 책(희곡, 그리고 연극)은 시간과 장소, 행위가 일치하는 하나의 '고전'이기도 하다. 모두 한 공간과 시간 위에 있으며,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 연극을 보러 왔지만 일상 위에 놓인 것과 마찬가지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타인에게 욕을 얻어먹는다는 것.


이 책은 굉장히 낯설면서도 정반합이 공존한다. 연극하지 않는다는 배우들은 어떻게 보면 연극 중이며, 연극을 감상하러 온 관객이 자세를 추스리고 마음을 다스리는 등 연극을 하기도 한다. 이 연극에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된다.


이 작품의 '가장 특별한 차별성'은 '언어극'이라는 신개념에 있다. 우리는 언어가 어떠한 '의미'를 지녀야 한다고 생각해왔겠지만, 페터 한트케는 이를 거부한다. 언어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언어가 연극 그 자체일 수 있으며 의미가 없어도 무방하다. 욕을 욕이라 생각하는 것이 의미이겠지만, 욕을 의미가 없는 단순한 언어(기호)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기분 나빠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근엄하게 대본만 읽고 내용을 따지는 독자들은 웃어야 좋을지 화를 내야 좋을지 결정을 못하고 똥 씹은 표정을 할 확률이 높지만, 연극 관객은 언어를, 아니 욕설을 비트 음악에 맞추어 반복적으로 읊어 대는 공연을 보느라 욕설의 의미를 따져 볼 겨를이 없다. - 민음사의 '관객모독' 작품해설 중에서). 이 작품에서의 언어(욕설 등)는 하나의 리듬이다.


언어와 시간 등은 물론, 연극 자체에 대해 재고하게 만드는 작품<관객모독>. 필자에게 있어, 이 작품은 신선한 충격을 안겨다줬다. 연극과 책 모두를 접하면서 더 빠져들게 된 작품. 봐도봐도 이색적인 작품인 만큼, '색다른 연극'을 접해보고 싶은 관객들에게 적극 추천해본다.



내 첫 희곡들의 작법은 (…) 연극 진행을 단어들로만 한정한 것이었다. 단어들의 서로 다른 의미는 사건 진행이나 개별 이야기를 방해했다. 연극이 어떤 구체적인 상을 그리지도 않고,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거나 현실이 아닌 것을 현실로 착각하게끔 하지도 않으며, 오직 현실에서 쓰이는 단어와 문장으로만 구성된다는 점, 그것이 이 작법의 핵심이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방법들에 대한 거부가 내 첫 희곡의 작법이었다.

by. 페터 한트케



[본문에서]


여러분은 우리가 여러분과 이야기할 때 우리를 쳐다봅니다.

여러분은 우리를 방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우리를 주시합니다.

여러분도 주시됩니다. 여러분은 보호받는 상태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바라보는 유리한 입장이 아닙니다. 우리도 빛 속에서 어둠을 바라보는 불리한 입장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우리를 쳐다봅니다. 여러분은 우리를 주시하고 또 우리에게 주시당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와 여러분은 점차 일체감을 느낍니다.

이것은 연극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막간 휴식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여러분에게 감동을 주는 어떤 사건도 없습니다.

이것은 연극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여기에 무대가 있다는 것을 아실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기대에 차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기대에 차 등을 뒤로 기댈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은 언어극입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울타리 밖 구경꾼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주제입니다.

여러분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우리 언어의 중심입니다.

여기 무대 위에는 여러분의 시간과 다른 시간은 없습니다.

우리는 같은 시간에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장소에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공기를 호흡합니다.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습니다.

여기는 여러분의 세계와 다른 세계가 아닙니다.

무대 앞쪽 가장자리는 경계가 아닙니다. 단지 가끔 경계가 될 뿐입니다.

(중략)

우리는 모두 같은 공간에 있습니다.

경계는 붕괴될 수도 없고, 통과될 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은 책략적인 사물들의 희극을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언어의 희극을 즐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처음부터 어두운 객석에서 연극을 보고 즐거워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우리가 여러분을 응시하고 말을 거니 심기가 불편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존재는 우리들이 말하는 모든 순간에 공개적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한 호흡에서 다음 호흡으로,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한 단어에서 다음 단어로 표현됩니다.

연극에 관한 여러분의 생각은 말없이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만, 우리 행동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방관자로 선택된 것도,

구경꾼으로 선택된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주제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선도자입니다.

여러분은 이 작품이 연극에 대한 토론이라는 것도 아셨을 겁니다.

여러분은 이 작품의 변증법적 구조도 아셨을 겁니다.

여러분은 확고한 반항 정신도 아셨을 겁니다.

여러분은 작품 의도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인식하셨을 겁니다.

우리는 행동도 연기하지 않고, 시간도 연기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시간은 한 단어에서 다음 단어로 진행되는 현실입니다.

여기서 시간은 단어들 사이를 흘러갑니다.

여기서 시간은 반복된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는 어떤 연극도 반복될 수 없고, 이전처럼 동시에 공연될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시간은 여러분의 시간입니다.

여기서 시간은 외부 세계와 단절된 시간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시간의 양면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두 세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동안에 지구는 돕니다.

여기 위에 있는 우리들의 시간이 거기 아래에 있는 여러분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우리 죽음을 연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을 연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앞으로 무엇이 될지 그리고 어떻게 될지를 미리 연기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연극에서 미래를 생생하게 연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시간을 연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비상사태를 연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말합니다.

세계가 무대가 아닌 것처럼 이 무대는 세계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서로 닮습니다.

여러분은 각자의 고유한 특성을 잃게 됩니다.

여러분은 서로를 구별할 수 있는 특징을 잃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통일체가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의 유형을 이룹니다.

여러분은 모두 동일해집니다.

여러분은 자의식을 상실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관객이 됩니다.

여러분은 청중이 됩니다.

여러분은 무감각해집니다.

여러분에겐 눈과 귀만 존재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시계 보는 것을 잊게 됩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잊게 됩니다.

여기 위쪽 무대와 아래쪽 객석은 더 이상 두 세계로 나누어지지 않고, 통일체를 이룹니다.

어떤 경계선도 없습니다.

이곳엔 두 장소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곳엔 오직 한 장소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장소의 통일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의 시간, 즉 관객과 청중의 시간은 우리들의 시간, 즉 말하는 사람의 시간과 통일체를 이룹니다.

여러분의 시간 외에는 어떠한 시간도 없기 때문에 통일체를 이룹니다.

여기에는 무대 위 시간과 공연 시간이라는 두 시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시간은 공연되지 않습니다.

여기엔 오직 실제 시간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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