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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나는 왜 혼자가 편할까?>

애착 장애·회피형 인간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제목에서부터 '움찔'함을 느낀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나 역시 그 중의 한 명…. 왠지 모르게 '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을 듯한 이 책. 저도 모르게 끌려 읽게 된 서적이다.


<나는 왜 혼자가 편할까?>는 혼자가 편해진 현대인들의 회피형 애착 장애에 대해 진단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들을 밝힌다. 회피형 인간이 어떻게 하면 자신의 단점을 극복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장점을 활용하여 최적화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데 기획의도를 갖고 있다. 책을 읽다 보니, 회피형 인간은 '특정인'에 국한된 것이 아닌 어쩌면 '현대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 듯 하다. 필자가 대부분의 문장에서 공감·반성하게 됐던 것처럼 현대인들 대부분은 회피형이든 불안형이든 애착 장애를 지니고 있다고 보여졌다. 그것을 입증하는 것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명인들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키르케고르, 에릭 호퍼, 조앤 롤링, 융, 헤르만 헤세, 미야자키 하야오는 '회피형 인간'이었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개척했다. 심지어, 책의 저자 오카다 다카시 역시 한때 히키코모리였다고 고백한다.


저자는 회피형 인간을 가리켜 '새로운 종'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이들이 타인과의 관계, 심지어 결혼과 자녀 갖기까지 회피하면서 인류의 존속 여부에 대해서도 고민하기에 이른다(멀리 내다보면 그의 의견은 명백히 옳다).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회피형 인간의 특징은 애정을 갖는 것이 부담이자 우울이며, 삶은 무기력하고 타인에게 무관심하다는 점이다. 모든 일을 귀찮아하는 그들은 나아가 자포자기의 상태를 보이는데, 이는 주체적인 삶과는 거리가 먼 형태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 상황이나 상대를 피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회피형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이자 문제점이다.


그렇다면, 회피형 인간이 된 것의 '원인'은 무엇일까? 여기에 대해 책에서는 다양한 연구(실험)결과와 상담 사례를 통해 후천적 체험(가정-양육-환경)의 원인이 크다고 말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전적 요인이 크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지금은 4분의 3 가량이 후천적 요인에 의해 애착 성향이 결정된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책에서의 상당 부분은 '부모의 역할'을 다뤄낸다. 한 몸과 다름 아닌 어머니의 역할과 사회에서 만난 첫 타인인 아버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올바른 자녀양육법을 설명한다. 이어, 연인과 부부관계의 중요성도 설명되며 애착 장애를 벗어나기 위한 정신치료법들도 열거된다.


궁극적으로 <나는 왜 혼자가 편할까?>가 강조하는 회피형 애착 장애로부터 벗어나는 핵심은 '애정의 관계'다. 안정된 애착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타인이 '거의 확실한 해결법'이라고 밝힌다. 자폐증, 인격 장애를 안고 있는 사람들을 치료한 '실제 사례'에서도 '긴밀한 애착 관계'가 큰 힘을 발휘했다면서, 안정된 애착 관계가 형성된 타인과의 소통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한다.


아무리 영양 공급을 충분히 해줘도 정서적인 안정감이 없어 성장하지 못했던 유아에 대한 바울비의 실험을 통해 '정서적 안정'이 설명된다.


그렇다면, 타인과의 관계에 의한 극복이 아닌 개인 스스로가 회피의 성향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먼저, 자신이 처한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면하라고 한다. 어차피 극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실패에 대해 용감하고 적극적으로 맞서서 주체성을 갖고 집중하라는 것이다. 자신의 회피 성향의 증상 자체를 치료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자신이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는 일이나 취미에 집중(p. 192>하면 자연스럽게 회피적 성향이 개선될 수 있다는 것이다. 타자를 회피한다는 것은 주체적인 삶을 포기한다는 것과 다름 아님을 강조하면서 애정의 대상을 찾고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라고 말한다('융의 자서전'에서 확연히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벼락에라도 맞은 것 같았다.

이것이야말로 현실과의 충돌이었다.

'아아, 그런가. 열심히 노력해야만 하겠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그 이후 나는 진지한 아이가 되었다.

조용히 그 자리에서 떠나 아버지의 서재로 들어가

라틴어 교과서를 꺼낸 후 열심히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10분 후 발작이 나와 실신해버렸다.

의자에서 살짝 떨어질 뻔 했떤 나는 몇 분이 지나지 않아 다시 기분이 좋아져서 공부를 계속했다.

'이런 빌어먹을! 실신 같은 걸 하다니' 하고 나 자신을 타이르며 그래도 계속했다.

거의 15분 정도가 지나자 두 번째 발작이 찾아왔지만

처음의 발작과 똑같이 그냥 무시했다.

'이제는 정말 공부해야 해!' 하며 나를 채찍질했다.

그리고 다시 밪 시간 후 세 번째 발작이 덮쳐왔다.

더 이상 나는 굴복하지 않고 반시간을 더 공부했다.

마침내 발작을 극복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갑자기 지난 몇 개월보다 더 기분이 좋은 것을 느꼈다.

발작은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았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 문법과 연습장으로 공부했다.

몇 주 후, 다시 학교에 가게 되었다.

학교에서도 발작을 일으키는 일은 없었다.

마법은 완전히 풀렸다.


『융 자서전』 중에서



끝으로, '죽음을 염두에 두라'고 말한다. 우리 모두는 숙명적으로 죽어가는 존재이며 결과적으로 놓고 보면 실패자에 다름 아님을 인식시키면서 굳이 회피하며 삶(현재)을 죽일 필요는 없다<p. 259-260중)며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라고 말한다.


우리의 삶에서 타인과의 애정어린 관계는 배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애정이 없다면 인간의, 나아가 인류의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심각성'에 대해 우리는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혼자만의 불편함에서 벗어나고자 '회피를 선택'하고 있는 것이 많은 현대인들의 모습이다. 우리는 이것의 심각성을 자각해야만 할 것이다. <나는 왜 혼자가 편할까?>는 이 문제를 진단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보다 나은 개인, 나아가 사회와 인류를 형성하는 데 노력을 투자한 책이다. 혼자가 편할지언정 결코 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본능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와 타자와의 관계를 '애정'하자. 필자 개인의 삶을 돌아보고 반성하게 만들어 준, 나아가 인간관계에 도움을 준 이 책에 진심으로 감사하다.



[tip]

꼭! 읽었으면 하는 독자(타깃)는, 어린 아이를 둔 & 출산을 앞둔 부모

'부록'의 애착 성향 진단 테스트부터 실시한 후, 독서를 시작할 것.




[책 속에서]


회피가 증상에 의해 강화되고 완성되면,

회피의 고리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스스로 증상과 정면으로 마주하면 증상의 속박에서 풀려날 뿐만 아니라

불안으로부터 회피하는 악순환을 타파할 기회도 생긴다. p. 191


모리타에게 어떤 학생이 두근거림과 강한 불안을 호소하며 치료를 받으러 온 적이 있었다.

학생은 "증상이 심해서 휴학한 후 치료에 전념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는데

그는 이에 대해 "병 때문에 휴학한다면 치료는 맡을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증상을 치료하려고 하면 안 된다고 설명했다.

학생은 그의 조언을 받아들여 계속 학교에 다니면서 '증상에는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방치하라'는 지시에 따랐다.

그 결과 학생은 낙제하는 일도 없었고, 증상도 자연스럽게 좋아졌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있는 그대로'라는 모리타 요법의 기본적인 개념이 만들어지게 된다. p. 192


문제 자체를 개선하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먼저 안정된 애착 관계를 만들어야 자연스럽게 문제가 해결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제 자체를 해결하려고만 혈안이 된 나머지, 애착 관계는 더욱더 나빠지고 부자연스러워져 결과적으로 문제도 더욱 악화되고 만다.

그러니 문제에 너무 사로잡히지 말고 안정적인 애착 관계를 만들려고 노력해야 한다. p. 211


어린 시절에 탄탄한 안전 기지 안에서 빈틈없는 보호를 받고 자란 사람은 훗날 어떤 일이 닥쳐도 마음속에서 안정감을 유지할 수 있다. p. 219


도망치지 않고 성가신 일에도 자신이 먼저 뛰어드는 적극적인 자세를 갖는 것이 회피하는 습관에서 벗어나는 결정적인 열쇠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벌어지는 일은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의지와 결단으로 살아가려고 각오를 다지는 것이다. 즉,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 p. 253


정말 필요한 것은 불안이나 공포로부터 도망치는 게 아니라,

그것들 앞에 과감히 자신을 드러내고 맞서는 게 아닐까.

불안이나 공포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 삶이라고 한다면,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려는 것은 자신의 인생으로부터도 도망치는 것과 같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계속 도망쳐봤자 마지막 순간에는 죽음이 쫓아와 당신을 집어삼킨다.

스스로를 판 속에 집어넣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죽음이 찾아오고 관 속에 들어가게 된다.

마지막은 모두 똑같다.

죽으면 불에 타 재가 된다. 도망쳐도 소용없다.

그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즉 마지막은 파멸과 절망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과만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모두가 패배자이다.

어떤 도전도, 결과라는 관점에서만 보면 마지막은 실패다. 이것은 불편의 진리이다.

우리는 그 결과를 선택할 수 없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뿐이다.

도전할 것인지, 하지 않을 것인지, 그뿐이다.

도망치며 살 것인가, 불안이나 공포와 맞서며 살 것인가? p. 259-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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