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봐도 좋은 '비포 시리즈'. 시간을 기록하는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로맨스 3부작은 제시와 셀린느의 로맨스 전과정을 스크린 위에 고스란히 반영한다. 즉 비포 시리즈에는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의 세월까지 반영돼 있다.
넷플릭스와 왓챠플레이에서 시청 가능하나, 왓챠플레이에는 '비포 미드나잇(3편)'이 없으므로 넷플릭스 시청을 권한다.
REVIEW 비포 선라이즈-선셋-미드나잇 순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라이즈>는 비포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제시와 셀린느는 기차에서 만난다. 단시간에 느낌이 통한 둘은 비엔나에서 내린다. 어떠한 계획도 없이, 무턱대고 내린 둘은 그렇게 하루를 그들만의 시간들로 채워나간다. 생각해보면, 둘은 20대 초반. 소위 '아무것도 모르는' 사회적 풋내기였기에 이런 활동에 응했던 것 같다. 만약 이들이 열 살 정도 더 나이 든 후 만났더라도 비엔나에서 내렸을까? 글쎄? 나라면 안 그랬을 것 같다. 물론, 20대 초반이었어도 셀린느와 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어쨌든 둘은 강렬하게 끌렸기 때문에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짧은 기간 동안의 사랑. 그래서 더욱 강렬하게, 알차게 사랑했던 그들. 사람은 모두 죽어가기 때문에, 즉 우리에겐 죽음이라는 문이 있기에 삶이 가치있는 것이다. 제시와 셀린느에게도 헤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기반돼있었기 때문에 흐르는 시간들을 최대한 만끽할 수 있었다. 끝을 알지만, 이별은 아쉬움과 슬픔을 동반한다. 아무리 작심하더라도 태연하게 대할 수 없는 것이 이별이다. 그래서 이들은 6개월 뒤, 동일한 장소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막연하지만 로맨틱한 다짐이다. 제시가 이렇게 말했다. "최악의 이별이 뭔지 알아? 추억할 만한 게 전혀 없다는 것." 그렇다. 둘은 추억이 가득 들어차있기 때문에 이별마저 로맨틱했던 것이다.
이들이 거니는 비엔나 거리 곳곳들은 여행에 대한 환상을 드높인다. 돈 없고 철 또한 부족한 둘은, 거리 곳곳을 누비며 많은 추억들을 쌓아간다. 다채로운 구경거리들과 마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포 선라이즈>에서 필자를 사로잡는 부분은 제시와 셀린느 사이를 오가는 대화들이다. 미국 남자와 프랑스 여자. 둘은 확연히 '다른' 존재다. 성별이 다르고 살아온 환경도 다르다. 각자 처한 삶이 다른 둘은 낯선 곳에서 만나 생경한 감정을 느낀다. 이 낯선 것들이 온 몸으로 파고드는 걸 그들은 '사랑'이라 명명한다. 운명적인 만남이라며 스스로, 그리고 서로에게 말한다.
하루동안 펼쳐지는 수많은 이야기들 속에는 제시와 셀린느 각각의 캐릭터와 그들이 안내하는 여행지들이 배어있다. 제시는 사랑에 대해 로맨틱하다기보다는 다소 현실적이다. 얼마 전, 애인과 이별한 이유 때문인지 그의 사랑 철학에는 냉소적인 측면이 있다. 반면 셀린느는 사랑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그 어떤 것보다 사랑은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게 셀린느의 입장이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평생 일에만 매달려 살았어. 52세에 문득 깨달았지. 사랑을 줘본 적이 없다는 걸. 삶이 무의미해졌대. 울면서 그렇게 말했어. '만일 신이 있다면 우린 안엔 없을거야. 너나 내 안엔. 우리 사이의 공간에 존재할거야.' 마법은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 속에 있을거야. 실현이 거의 불가능하겠지. 그럼 어때? 해답은 노력속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 사랑을 위해서는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이것이 셀린느의 사랑 철학이다.
결혼에 대한 둘의 대화를 보면 확연히 파악할 수 있다.
셀린느: 할머니는 남편밖에 모르는 분 같았어. 그런데 고백하길 평생 맘속으로 딴 남자를 그리며 사셨다는 거야. 운명에 순응한 거지. 정말 슬픈 일이야. 한편으론 기뻤어. 그녀에게 그런 감정이 있다는게.
제시: 차라리 잘된거야. 그 남자와 만났으면 결국 실망했겠지.
셀린느: 네가 뭘 알아?
제시: 난 알아. 사람들은 낭만적 환상을 갖길 좋아해. 아주 비현실적이지.
어찌됐건 이들은 아직 결혼 전이고, 무엇보다 진득한 연애도 시작하기 이전이다. '비포 선라이즈'. 해가 떠오르기 전, 그들은 생기발랄한 우연의 만남을 통해 기분 좋은 사랑의 서막을 열었다. 그렇게 황홀하게 보였던 비엔나 거리 곳곳은, 제시와 셀린느가 떠나고 난 후 그저 텅 빈 거리로만 비춰진다. 두 남녀의 아쉬운 체취를 남긴 비엔나 거리들. 그렇다. 우리는 비엔나의 풍경들보다 두 남녀에게 집중돼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둘의 로맨틱한 만남과 아쉬운 이별을 끝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그리고 <비포 선셋>으로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우리에게 '진짜'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비포 선셋
9년 만에 재회한 제시와 셀린느. 9년 전, 그들은 하루동안의 강렬하고도 짜릿한 로맨스를 시작했고 또한 희망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6개월 후, 같은 장소에서 재회하자는 낭만적인 다짐을 했지만 역시나 지켜지지 못했다. 9년 뒤, 제시는 셀린느와의 추억을 담은 소설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출판기념회를 위해 프랑스를 방문한다. 이로 하여금, 둘은 재회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둘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다. 이번 만남은 9년 전보다 훨씬 짧다. 제시가 비행기에 오르기 전 단 몇 시간. 이 한정된 시간 속을 메우는 제시와 셀린느 현재의 삶, 그리고 그들만의 추억 이야기가 <비포 선셋>의 전개 그 자체다.
이들의 사연은 여느 사랑 이야기들보다 애틋하다. 그래서 귀 기울일 수밖에 없고, 왠지 둘의 관계가 가까워져야만 할 것 같은, 그것을 응원해야만 할 것 같은, 그것이 마땅한 도리인 듯 느끼게 만든다. 79분의 러닝타임은, 마치 오랜만에 재회한 친구와의 짧은 티타임 같은 애틋함과 아쉬움의 감정을 선사한다. 제시와 셀린느가 헤어질 것을 알기에 우리는 이들의 커피가 줄어가는 것, 걸어가는 길이 목적지와 가까워지는 걸 아쉬워할 수밖에 없다. 마치 내가 제시 혹은 셀린느가 된 마냥, 흐르는 시간에 발을 동동 구르는 절박함을 느끼는 상황. 비포 시리즈의 두 작품, 그러니까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을 볼 때면 마치 내가 셀린느가 된 듯한 기분에 휩싸인다. 시간이 멈추길. 혹은 내가 제시와 동일한 시공간에 머무는 여성이길 바라는 마음 등, 나는 이 시리즈를 볼 때마다 셀린느와 동일시된다.
<비포 선셋>은 다분히 현실적이다. <비포 선라이즈>가 제시와 셀린느 모두에게 낯선 공간에서 일어난 첫 만남이라는 생경함으로 똘똘 뭉친 작품이었다면, <비포 선셋>의 익숙한 정서를 밑바탕에 둔다. 배경은 셀린느가 살아가는 장소이며, 둘은 서로를 그리워해왔다. 그래서 <비포 선셋>에서는 제시와 셀린느. 각자의 캐릭터가 두드러진다. 현실적으로 따져봐도, 서른을 넘긴 두 남녀는 어느정도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법한 시기이기도 하다. 게다가 제시는 결혼했고, 아들까지 둔 상태이며 어느정도 작가로서 입지도 굳힌 상태다. 셀린느는 미혼이며 환경 단체에서 근무 중이다. 전작에서도 느낄 수 있었듯, 여전히 그녀는 페미니스트의 성향이 다분하다. 강인하며 독립적인 여성. 그 캐릭터가 굳어진 셀린느다.
그 어떤 낭만적인 대화가 이어지고 묘한 분위기가 감돌아도 이제는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할 때가 된 그들. 9년 전처럼 행동한다면 다소 위험한 상황이기에, 이들의 행동에서는 불편한 기색이 묻어나온다. 자신의 삶은 찾았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아직 답을 찾지 못한 듯한, 그래서인지 그들의 삶은 100점 짜리 인생으로 보여지진 않는다.
제시는 떠나야 할 때가 임박했음에도 좀처럼 재회의 기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급기야 셀린느의 생활권으로까지 들어간 그. 이때부터 왠지 모를 낭만의 분위기가 샘솟기 시작한다. 영화의 끝자락에서 말이다. 셀린느는 제시를 염두에 둔 듯한 노래를 부르고, 제시는 자리를 뜰 생각을 않는다. 이 영화의 끝은 어떻게 마무리될까? 열린 결말로 마무리되는 <비포 선셋>. 이 영화의 매력은, 제목처럼 해가 지기 전, 그러니까 영화가 끝나기 전 가장 뜨겁고 아름답게 마무리되는 데 있다. 영화는 끊임없이 온기를 이어나가다가, 해가 떨어지기 직전의 오묘한 미적 세계로의 초대를 통해 관객들을 황홀경에 빠트린다. 그래서 '비포 시리즈 마니아'들은, <비포 미드나잇>이 하루 빨리 나오길 기다렸을 것이다.
비포 미드나잇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비포 시리즈' 세 편은, 청년들의 만남, 성숙한 남녀로서의 재회, 지극힌 현실적인 부부가 된 남녀를 날 것 그대로 묘사한다. 우리는 제시와 셀린느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그들의 역사와 삶의 다양한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비포 미드나잇>은 비포 시리즈의 마지막 시리즈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첫눈에 반했던 그들은 헤어졌고, <비포 선셋>에서 9년 만에 재회한다. 제시는 결혼한 상태이지만, 여전히 셀린느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비포 미드나잇>에서 우리는, 부부가 된 제시와 셀린느를 만나게 된다.
영화의 첫 신은, 제시가 공항에서 아들 헨리를 배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후, 제시는 셀린느가 기다리는 차에 탄다. 뒷좌석에는 쌍둥이가 잠들어 있다. 행복해보인다. 하지만 이내, 작은 말다툼이 시작된다. 제시와 셀린느가 이전부터 줄곧 해왔던 대화 그 이상의 논쟁은 <비포 미드나잇>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제시와 셀린느는 각자의 방식대로 제법 똑똑한 삶을 살아온 인물들이다. 이는, <비포 선셋>에서 두드러진다. <비포 선라이즈>에서도 이들의 지식과 상식은 여과 없이 드러나지만, 특별함을 추구했던 그들도 결국 여느 직장인들처럼 비슷하게 취직하고 무언가에 쫓기듯 바삐 살아간다. 그야말로 너나 할 것 없는 전쟁 같은 현실 속 개인일 뿐이다.
셀린느는 하룻밤 사건으로 부엌데기가 된 자신을 한탄하고, 제시는 운명적인 사랑을 지켜내고자 과거의 무게를 감당해가며 아슬아슬하게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제시와 셀린느의 그리스 휴가 속에서 별별 상황들을 다 본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서로를 헐뜯고, 각자가 망가져가는 둘의 모습은 무섭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기적처럼 사랑을 확인한다. 이들의 사랑은 환상적이라기보다는 현실적이다. 중년의 그들은 보다 행복한 부부가 되기 위한 방법들을 터득해나간다.
<비포 미드나잇>이 여느 시리즈와 다른 점은 '지극히' 현실적인 작품이라는 것이다. '내가 비록 이 남자와 쌍둥이를 돌보느라 사색의 시간이라고는 회사에서 똥 누는 시간밖에 없다지만, 이 남자가 바로 그토록 하룻밤을 함께하고 싶었던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지!'라는 셀린느의 대사만으로도 알 수 있지 않은가? 특히, 그리스 게스트하우스 파티에서의 다양한 연령대 남녀가 펼치는 이야기는 관객들 스스로를 성찰하게 만든다.
결국, 제시와 셀린느는 서로를 인정하고 다독여준다. 이들이 깨달은 것은, 세상에는 완벽한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좋은 관계를 이어 부부가 되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과정은 누구에게나 힘들다. 게다가 우리는 일까지 해야한다. 이 많은 역할들을 완벽히 소화해낼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아니,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그러다보면, 옆에 있는 소중한 사람에게 불만을 표하고 비난할 경우도 생기게 마련이다. 사실 우리는 머리로는 잘 알고 있다. 힘든 때일수록 함께여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곧잘 잊는다. 함께인 사람의 소중함을 말이다. 완벽하지 않은 개인이라도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나간다면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사랑과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제시와 셀린느가 서로를 인정하고 화해한 것처럼, 상대와 갈등 중이라면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어보자.
과거 혹은 현재의 사랑을 돌이켜보게 만드는 '비포 시리즈'. 언제 보느냐에 따라 관점이 달라질 수 있으니, 잊고 있었다면 재시청해보는 것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