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 가득 채워진 로맨틱 감성
<타락천사>에 이어 <중경삼림>을 감상했다. 두 영화는 본래 하나의 작품으로 촬영됐으나 러닝타임이 너무 길어져 두 개로 나뉘게 된 것. 따라서 두 영화는 하나의 맥락으로 이해하면 된다. 두 작품 모두를 감상했다면 공감할 것이다.
<중경삼림> 역시 <타락천사>에서처럼 인물들의 내면을 바깥으로 잘 구사해낸 것이 특징이다. 몽환적인 색채들과 흔들리는 카메라는 동요된 캐릭터들의 내면을 반영한다. 왕가위 특유의 '스타일'이 가장 잘 배어있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중경삼림>은 사랑과 이별을 겪는 청춘들을 그려낸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스친다. 개중에 깊은 인연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저 스쳐 지날 뿐이다. 수많은 사람들과 스치고 혹은 깊은 관계를 맺지만, 우리는 왜 이토록 쓸쓸한걸까. 연이 닿아 사랑으로 발전했던 우리는 왜 세상 그 누구보다 먼 관계가 되어버리는걸까. <중경삼림>은, 아니, 왕가위의 영화들은 이 만남과 헤어짐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왕가위의 영화들은 스토리와 캐릭터가 배경과 색채, 온도 등 모든 연출과 직결된다. 침사추이의 뒷골목에서 펼쳐지는 네 명의 남녀들의 감정선이 수많은 일상 위에 펼쳐진다. 오래된 연인에게 실연 당한 금성무, 5월 1일(자신의 생일)이 유통기한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죄다 사모은 뒤 그때까지 연인을 기다리기로 다짐한 그의 행동은, 괴짜스러워보이는 동시에 연민을 유발시킨다. 결국 애인은 돌아오지 않고 5월 1일 이후 통조림을 죄다 먹어버린다. 그날밤 우연히 금발의 레인코트를 입은 여자 임청하와 하룻밤을 보낸고, 이들의 에피소드는 끝난다.
다음 에피소드의 양조위 역시 오랜 연인에게 실연을 당한다. 매일 애인을 위해 스낵바에 들러 똑같은 샐러드를 사가던 그는 더이상 그 행위를 할 필요가 없어진다. 스낵바에 들르는 이유는 그저 몸에 배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짝사랑하는 점원 왕전문. 그녀는 양조위 몰래 그의 아파트에 들러 청소와 새단장을 반복한다.
<중경삼림>의 정서는 이별로 인한 상실과 그리움이다. 금성무와 양조위는 나름의 방식으로 옛 연인과의 이별을 극복해나간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다. 그녀들이 좋아했던 추억 어린 것들을 삼켜버리는 행위로 옛 사랑을 지워나가는 그들이다.
사랑을 잊는 방법들 중 하나로 <중경삼림>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도 괜찮을 듯 하다. 그(그녀)와의 추억을 모두 삼켜버리는 방법 말이다. 그리고 새로운(스치듯 오는) 인연을 찾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네 인생 속 만남과 이별의 형태이다. 끊임없이 스치고 헤어지는 사람들. 개중에 진정한 인연을 찾는 일이란 보통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언제 어디에서라도 인연의 끈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또한 그 인연은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닌 스치듯, 우연이 다가오는 경우도 많다.
왕가위의 영화들을 볼 때면, 지난 삶을 돌아보게 되는 동시에 미래에 대한 희망도 얻게 된다. 게다가 심장 떨리게 만드는 로맨틱한 장면들(캐스팅 덕도 큼) 덕분에 좋은 여운이 오랫동안 이어진다. 나를 설레게 만드는, 아름다운 연출과 기분 좋은 음악들로 눈과 귀를 즐겁게 만들어주는 영화. 그래서 왕가위의 영화들은 보고 또 봐도 좋다.
<중경삼림>은 3월 4일 리마스터링 재개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