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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터널 선샤인>의 오프닝 시퀀스

작품의 시작은 조엘이 침대에서 일어나는 장면이다. 우울한 겨울햇살이 낮게 흘러들고 있고, 공기는 창백하게 부유하고 있다. 조엘은 회사에 가던 길에 그만 몬타우크 행 기차를 타고 만다. 아무도 없는 쓸쓸한 곳, 그 곳에서 그는 작은 집을 찾아 차 한 잔을 하고, 노트에 끼적이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를 탄다.


참, 한 가지 잊은 것이 있다. 희한한 머리 염색을 하고 처음 보는 남자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거는 여자 클레멘타인. 그 여자는 활발하고 화끈했지만, 조엘은 왠지 부담스러운 눈치이다. 여자는 돌아오는 기차에서 말을 걸기도 했다. 하지만 조엘은 조용히 그리고 홀로 있고 싶어 한다.


그러나 조엘은 클레멘타인의 매력에 넘어가고 그녀와 심야의 비밀스러운 데이트를 즐기게 된다. 그리고 새벽에 클레멘타인이 칫솔을 들고 나오기를 기다리며, 그녀의 집 앞에 있는데 낯모를 청년이 차창을 두드린다. 괜찮으냐며. 청년의 괜찮다는 말을 기점으로 오프닝 시퀀스는 끝나고 본 플롯으로 접어든다.



시간상으로 플롯은 오프닝 시퀀스 이전이다. 거꾸로 말하면 오프닝 시퀀스는 플롯의 거의 결말 부분에 해당하는 이야기 한 토막을 잘라 먼저 구현한 형태이다. 따라서 본 플롯이 진행되는 동안, 조엘과 클레멘테안이 어떻게 만나서 어떻게 헤어지게 되어는가를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몬타우크에서 재회한다. 자신들도 서로가 구면임을 모른 채, 이상하게 마음에 끌리는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하며.


오프닝 시퀀스의 위치는 기묘하다. 오프닝 다음은 조엘이 슬퍼하는 모습이고, 그 다음은 조엘이 클레멘타인을 만나러 갔는데도 그녀가 모른 척 하는 장면이며, 그 다음이 클레멘타인이 기억을 지웠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 대목이다. 이러한 씬들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시간의 경과로 이해된다. 조엔과 클레멘타인이 서로 호감을 가졌다가 심각한 사이로 발전했다가 차츰 헤어지고 있구나. 칫솔을 가지러 간 이후에 두 사람의 관계는 크게 발전했구나, 라고.


하지만 영화를 거의 보게 되면 오프닝 시퀀스가 실은 처음이 아니라 나중임을 알게 된다. 오프닝 시퀀스는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첫 번째 사귀는 동기를 보여준 것이 아니다. 오프닝 시퀀스에 담긴 만남은 두 번째 만남이다. 서로에 대한 기억을 잃고 우연히 다시 만난 경우이다(물론 우연은 아니다).



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흥미 유발이나 복선 역할 혹은 의미 파생의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오프닝을 통해 플롯에 대한 착각을 일으키도록 유도하고 그 착각이 발견되는 시점에서 오프닝 시퀀스를 반복한다. 이러한 구조는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 종반에서 영화 초반 상황을 상기하게 만들고 반복의 묘미를 살려 관객들로 하여금 지적 조립 과정을 밞도록 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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