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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과의 추억

벚꽃을 떼어놓고 봄을 논하지 말라

벚꽃을 찾아 여행을 떠난 적이 많지 않았던 것 같은데,

돌이켜보니, 생각보다 벚꽃과의 추억이 많았다.

역시, 기억을 이기는 건 사진과 글 등 다양한 형태의 기록이다.





20대 이후의 벚꽃과의 기억들을 회상해본다.

기억에 남을 만한 여행지에서의 추억들보다, 봄바람에 취해 가벼이 걸어다니며 만났던 벚꽃들과의 추억이 대부분이다.


스물 두살 때였던가.

대학교 캠퍼스, 연못가에 놓여있던 벚꽃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있다. 그땐, 꽃의 낭만에 대해 인식하지 못했었다. 왜 계절에 맞는 꽃들을 찾아떠나야 하는지, 그런 것들은 일종의 피로함으로 여겼었다.

그런데, 그 생각에서 벗어나게 만든 계기가 있다. 아마 같은 해였을 거다.


아주 친한 오빠와 이기대공원을 찾았다. 그때가 졸업반이었고, 웬만한 일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던 나였지만 자각하지 못한 스트레스들이 나를 짓누르고 있던 때였다. 그때까지는(사실, 지금도) 운동화를 거의 신지 않았는데, 심지어 이기대공원의 산책길을 오를 때도 굽이 10cm가 넘는 구두를 신었다. 당연히 복장은 치마였다. 그렇게 힘겨운 산책을 하면서 나는 참으로 예쁜 벚꽃들과 만났다. 사실, 그때 전까지만 해도 꽃의 매력을 잘 몰랐다.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샌드위치 사들고 나름의 봄나들이를 나갔던 그때. 꽤나 더워서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날 이후로 나는 벚꽃의 아름다움을 조금씩 알아나가기 시작했다. 색채도, 꽃들이 지닌 무게감도 가볍디 가벼운 게 벚꽃이지만, 그것이 전하는 인상은 한없이 강렬하다.





졸업 후, 곧장 상경했던 나는 또다시 벚꽃낭만과 이별하게 된다.

나름의 취업 스트레스가 있었고, 취업 후에도 3일에 10시간도 못 잤던 나는 자연의 낭만을 즐기기엔 까다로운 환경에서 발버둥칠 뿐이었다. 간혹, 길 가다 마주친 서울의 벚꽃들은 병약해보였고, 마치 내 신세와 닮아보이는 그들을 애써 외면했던 것 같다.


조금 편안한 직장을 찾은 이후, 비로소 계절의 변화에 관심을 둘 수 있었다.

친구와 여행을 갔다. 장소의 첫째 조건은 무조건 서울을 벗어나자는 것이었다. 벚꽃을 보기 위해 우선적으로 피해야 할 장소는 여의도벚꽃축제와 같은 곳이었다.


여수에서 만났던 벚꽃들은 참 좋았다.

사실, 그 여행의 목표는 벚꽃이 아니었다. '처음 가본 여수를 샅샅이 파헤치자'였다. 한데, 이동하는 곳곳마다 건강한 벚꽃나무들이 나를 사로잡았던 게 아니던가! 애써 꾸미지 않아도 건강미를 뽐내는 여수의 벚꽃들 아래에서 나는 수도 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내게 있어 여수는 특정 장소들보다 '벚꽃이 아름답게 피는 도시'로 기억되고 있다.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다.





작년이던가.

친구를 만나기 위해, 아무런 목적 없이 경주로 향했다. 경주는 1년에 두 세 번은 가게 된다. 갈 때마다 날씨가 꽤 만족스러웠는데, 이날은 이상하게도 도착하자마자 음울하게 변했다. 칼바람이 몰아치더니 이윽고 억수가 쏟아졌다. 벚꽃의 추억은, 비 내리기 전 어떠한 장소로 이동하지 않고 터미널 주변에서 즐긴 단 5분 정도가 전부다. 몇 개월 동안 못만났던 친구와의 재회가 반가웠던지, 커피숍에서 7시간 가량 이야기나눴다. 그게 끝이다. 그럼에도 어찌됐든, 나는 친구와의 재회여행을 미화하고 싶어 '경주에서의 벚꽃 구경'이라고 그날을 기록하고 싶다.





뚜렷한 목적을 두지 않고 만났던 벚꽃이기에 추억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은근슬쩍 그들과의 추억이 짙다. 올해는 어떠한 날들이 펼쳐질까. 바람이 있다면, 건강미 넘치는 벚꽃들과 만나고 싶다는 것. 피고지는 시기는 짧지만, 가급적이면 많은 사람들과 소중한 추억들을 남기고 싶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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