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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펜하이머> 리뷰

불운의 프로메테우스의 운명처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놀라운 신작 <오펜하이머>가 잔잔하게 흥행세를 이어가고 있다. 오프닝부터 범상치 않은 이야기가 펼쳐질 것만 같은 미장센으로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던 작품.


<오펜하이머>의 오프닝은 J.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대학 시절로 시작된다. 바닥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일으키는 파동을 지켜보는 시선으로 시작된다. 이후 거대한 연못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눈을 질끈 감는 오펜하이머의 모습이 클로즈업되면서 엔딩 장면이 펼쳐지게 된다.


이는 영화 자체가 거대한 핵폭발과 같다는 은유다.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성공시키지만 결국 그로 인해 파멸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하나의 성과가 개인과 인류의 폭발(파멸)이라는 것을 미장센으로 보여준다.



작은 빗방울들이 모여 거대한 연못을 만드는 것처럼 오펜하이머의 선택(결정)들이 연쇄 작용을 일으켜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는 과정을 함축한 오프닝과 엔딩 장면에서 놀란 감독의 연출력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오펜하이머>는 1938년 독일의 물리학계에서 밝혀진 우라늄의 원자핵이 쪼개질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토대로 전에 없던 위력의 무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실체화시킨 오펜하이머의 이야기를 그린다. 1920년대 오펜하이머의 불행했던 영국 유학 시절부터 1930년대 미국의 핵무기 개발 작전인 맨해튼 프로젝트를 거쳐 매카시즘의 광풍이 부는 1950년대까지의 삶을 다룬다.


오펜하이머는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한다. 뛰어난 과학자이자 팀원들의 갈등을 조율하고 대담한 결정을 내리는 결단력까지 발휘한다. 핵실험을 성공시킨 몇주 뒤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는 장면은 영화를 보는 모든 이들을 숨죽이게 만든다.



인류를 구원한 오펜하이머. 그러나 그 영광은 오래가지 못한다. 1950년대 미국 전역을 휩쓴 매카시즘 광풍은 오펜하이머를 청문회에 세운다. 종전 이후 수소 폭탄 개발을 비롯한 전후 군비 경쟁에 반대해 온 그는 좋은 먹잇감이 된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전 오펜하이머가 참여한 교수 노조 조직 활동과 사회주의 모임은 그의 발목을 잡고, 열렬한 사회주의자였던 진 태드록과의 사랑 역시 그의 애국심을 의심받게 한다. 수십 년 전 기혼의 연인과 나눈 밀회, 가족의 공산당 가입 이력, 칠밀하게 지냈던 친구들까지 모든 것이 발가벗겨지며 난도질 당하고 만다.



오펜하이머의 운명은 신들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가져단 준 죄로 독수리에게 영원히 간을 파먹히는 형벌을 받은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와 흡사하다.


영화는 오펜하이머가 논쟁의 중심이 되어야 했던 고뇌와 갈등 속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보여주며 오펜하이머의 삶을 판단하게 만든다. 구원자이자 파괴자라는 모순적인 평가를 받는 오펜하이머의 운명 앞에서 옳고그름을 판단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18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지루할 틈 없이 밀도 높은 서사로 관객을 락인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극의 몰입도를 최상으로 끌어올린 주 요인은 오펜하이머 역을 맡은 배우 킬리언 머피의 호연 덕분이다. 갈등과 고뇌에 휩싸인 인물의 내면을 기가 막히게 표현한다. 특히 표정연기가 압권이다.


몇몇 '지루하다'는 평가를 하는 관객들도 있지만, 나는 그들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모든 인물들의 대사와 몸짓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니까. 마치 내가 이 사건에 깊게 관여된 사람처럼 몰입하며 봤다. 또한 오펜하이머의 삶을 통해 인생사를 배우기도 했다. 삶은 한 방향만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선택에는 반드시 어떠한 결과가 따른다. 그 결과가 좋은 쪽이면 좋겠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때로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휩싸일 수도 있다. 때문이었을까. 오펜하이머의 운명이 서글프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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