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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삶으로부터의 혁명>

사랑에서 죽음까지… 청춘들에게 권하는 인문학 서적

책<삶으로부터의 혁명>은 <청춘인문학>의 저자 정지우 작가가 이우정 작가와 합심해 완성한 인문학 서적이다. 이 책은 '인문학'을 어렵게 여겨왔던 독자들에게 '삶'이라는 넓은 개념의 소재를 제안하며 접근성을 시도한다. 제목은 다소 투박해보이지만('혁명'이라는 단어가…), 책은 독자들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정리하고 제안함으로써 인문학에 대한 흥미를 갖게 만들어준다.





정지우 작가의 <청춘인문학>에 매료됐던 필자는, <삶으로부터의 혁명>에 대한 기대감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만족스러운 독서를 경험했다. 특히, 영화감상과 책읽기를 좋아하는 필자는 책에서 저자들이 고안해낸 구성 방식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들은, 다양한 영화와 책들을 삶에 대입시키면서 독자들의 이해도를 높였다. 또한, 이같은 방식은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적합했다. 작품들 뿐만 아니라 명인들의 격언들도 제시되는데, 이는 풍부한 정보 제공은 물론이거니와, 심적 울림을 이끌어내는 데 큰 몫을 해낸다. 소개된 다양한 콘텐츠들과 저자들의 주장이 모든 독자들에게 맞는 생활 양식은 아니다. 하지만, 다양함을 접하고 그것을 스스로의 의견과 빗대어보며 성찰하고 물음하는 것. 이것이 인문학의 본질 아닐까.


책의 구성은 총 3부로 나뉜다. 1부에서는 '청춘'이라는 소재(타깃)로 그에 걸맞은 멘토들을 소개하고 '삶과 현실의 차이'를 설명한다. 우리들 중 대부분은, 삶과 현실을 동일한 개념선상에 두고 살아간다. 하지만 이 둘의 개념은 다르다는 것이저자들의 주장이다. 많은 사람들이 '현실에 안주'하거나 '타인의 시선에 의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는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타자에 의한 기준에 의한 수동적인 삶이 아니다. 타자의 기준에 의한 삶은 '현실을 걷고 있는 것' 뿐이다. '진정한 의미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저자들이 주장하는 바는,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들을 찾아가는 노력', 즉 주체적인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2부에서는 '타인'을 소재로,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형태 위에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제시한다. 타인의 개념을 설명한 후, 삶보다 현실을 택한 현대인들이 타'인'이 아닌 타'자'―나를 제외한 모든 것(여기에는, 돈, 명품, 명예, 권력 등이 포함됨)들―가 정해놓은 시선 위를 걷고 있음을 지적한다. 3부에서는 '자아'를 소재로, 현재의 시대상황과 현대인의 병폐를 지적한다. 여기에서는 현대와 근대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현대인들에 만연해 있는 '개인주의'를 비판한다. 지나치게 감정에 치우친 현대인들의 현실을 지적하면서, 인간으로서 겪어야 할 숙명인 '죽음'의 가치를 역설(力說)한다. '죽음을 기억하라(메멘토 모리)'에 대한 메시지는 수많은 인문·철학서에서도 강조되는 메시지다.


결론은, 청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제3의 자아와 시선, 직관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제1의 시선인 '주인 자아(나)'에 갇힌 삶, 제2의 시선인 '노예 자아(타자)'에 의한 수동적인 삶이 아닌, 보다 능동적이고 객관적인 제3의 시선을 설정해두고 '진정한 자신'을 설립하라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주인 자아와 노예 자아에 귀속된 현실에서 벗어나 참된 삶의 기준을 정립하고 개척해나갈 것, 호혜주의와 타자 환원주의를 실천하면서 타자가 아닌 '타인과의 사랑'으로 삶을 복권해나갈 것이 강조된다. 삶이 죽음으로 향하는 데 있어, 직선길만을 걸어나갈 수는 없다. 곡선길(굴곡)과의 만남은  필수불가결하다. 타자의 시선과 비교에 의한 삶이 아닌, 진짜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 여느 인문학 서적에서도 익히 다뤄지는 주제이지만, 우리가 끊임없이 인문학을 접해야 하는 이유는, 결국 타인의 이야기를 읽기 위해서 아니겠는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책이 전하는 메시지를 곱씹고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나갈 것. <삶으로부터의 혁명>을 효과적으로 읽는 방법으로 제안해본다.



[본문에서]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 Le My the de sisyphe, 1924>에서 결국 인간이 허무주의의 극단에서 발견하는 것은 끊임없는 성실함 그 자체라고 말한다. - 131쪽


근래에 나온 한병철의 <피로사회, 2010> 역시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즉, 그는 현대인이 구조적으로 사회 속에서 활동의 과잉에 의해 자기를 소진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현대인은 더이상 누구의 지배를 받아서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성공을 향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착취하고 있다. - 202쪽


청춘은 처음 세상과 마주하는 시기이고, 그 속에서 가장 부드럽고 연약하며 변화무쌍한 '시작' 단계의 자기 자신과 만나는 시간이다. - 222쪽


플라톤에 의하면, 인류는 태초에 혼자가 아니라 둘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크게 세 종족이 있었는데, 남자와 남자가 붙어있는 경우, 여자와 여자가 붙어있는 경우,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붙어있는 경우다. 이들은 각기 네 개의 팔과 네 개의 다리, 그리고 두 개의 얼굴과 두 개의 성기를 가지고 있ㅇ서 매우 강한 힘을 가지고 재빠르게 굴러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힘이 너무 강해서, 위협을 느낀 제우스가 번개를 내려 그들을 갈라놓았다. 그리하여 인간은 평생 동안 자신의 반쪽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 223쪽


우리가 명백히 인식해야 할 것은 이러한 경향들이 하나같이 '추'하다는 것이다. 미의식은 정확히 자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일으키게 한다. 근래에 이 '부끄러움'이라는 것은 거의 우리에게서 사라지는 감정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가 느끼는 부끄러움이란 오직 현실적 경쟁에서 열등감을 느낄 때뿐인데(여기에는 부, 명예, 외모, 학벌 등 모든 현실적 요소가 포함된다), 이는 한마디로 '남 눈치를 보며' 사는 것이지, 진정한 품격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 260쪽



[격언들]


고독.

그러나 혼자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닌, 이를테면 소로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스스로 유배시켰던 것과 같은 고독도 아니고, 요나가 고래의 배 속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했던 것과 같은 고독도 아닌, 물러난다는 의미로서의 고독.  - 폴 오스터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알게 되고, 자신이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존재가 아니라 무언가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사랑을 느낄 때이다.  - 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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