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분신 찾기
감독이 되기 전, 화가를 꿈꿨던 김기덕. 그의 미술적인 취향은 작품들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특히, <파란 대문>에서는 에곤 실레(Egon Schiele)의 작품들이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한적한 바닷가. 에곤 실레의 작품 '소녀의 누드(1910)'를 들고 바닷가 위에 자리잡은 여자, 진아. 그녀는 하염없이 바다의 풍광을 감상한다. 무언가 '사연'이 있어보이는 그녀. 그녀의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드는 도입부다.
진아가 선택한 작품은, 실레가 19살 때 화실을 차린 뒤 성추문에 휩싸일 때 그려진 것이다. 길거리를 방황하는, 이른바 버려지다시피 한 소녀들과 창녀들이 실레의 화실을 자유로이 오갔다. 그녀들의 그림을 상당량 그려냈던 실레. 작품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깡마른 몸에 메마른 표정을 하고 있다. 육체와 정신에서 도무지 생기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진아는, 실레의 작품 속 여인들과 닮았다. 육체는 메말랐고 표정에도 생기가 없다. 모든 것을 잃은 듯한 모습이다. 삶에 대한 욕구가 없어보이는, 매사에 체념한 듯한 표정이 인상적이다. 알고보니 그녀는, '새장 여인숙'이라는 곳의 새 매춘부로 왔다. 그 집에는 진아와 나이가 같은 여대생 혜미가 주인집 딸로 살고 있다. 나이는 같지만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왔던 두 여인의 간극. 결코 좁혀질 수 없을 것만 같다.
하지만 이들은 관계선상에 놓일 수밖에 없다. 혜미의 가족은 사실상 진아의 매춘 덕분에 생계를 이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미는 진아가 싫다. 함께 식사하는 것도 불쾌하고, 마주치는 것 자체도 싫다. 진아의 매춘 덕분에 자신이 대학에 다닐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다. 고맙다는 생각을 일말에도 없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시간이 흐를수록 좁혀진다.
사실상 진아는 혜미의 분신과 다름 아니다. 이는, 김기덕 감독의 장기인 상징적인 미장센들로 하여금 분명하게 보여진다. 두 여성의 정체성, 여성의 본질 면에서 이들은 동일하다. 혜미는 스스로를 성적으로 억압한다. 남자친구의 가벼운 스킨십에도 거부 반응을 보이는 그녀다. 매춘을 이용해 생계를 이어나가는 집안의 딸이기 때문에, 어쩌면 혜미에게 성에 대한 것들은 죄의식으로 이어져 있다. 매춘을 하는 진아에 대한 강한 폭력성을 지니고 있다. 실제로 혜미는 '내면적 살인'을 저지른다. 경찰에 아버지와 진아를 고발하는 등 어떻게든 진아를 괴롭히기 위한 갖은 노력을 한다. 하지만 이후, 혜미는 진아의 '의외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녀의 방(새계)으로 첫 입문하게 된 혜미. 실레의 그림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등이 자리잡고 있는 진아의 방은 창녀의 방이 아닌 대학생의 방과 흡사하다. 또한,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결정적인' 소품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진아가 혜미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이때부터 혜미는 진아에게 마음을 연다. 진아의 세계에 관심을 보이고, 그녀와 점점 친밀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둘의 닫혔던 경계는 조금씩 허물어가면서, 끝내 동일시된다.
따라서, 영화의 끝부분에서는 혜미와 진아가 동일인물이 된다. 혜미의 방에도 실레의 그림들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자리잡게 되고, 나아가 여인숙을 찾은 손님을 혜미가 맞으러 간다. 이때의 풍경은 한여름밤에 눈발이 휘날리는데, 이는 초현실의 공간이다.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를 허물어가는 과정. 이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표현기법이다. 결국, '쌍둥이'처럼 하나로 포개어지는 두 여인은 실레의 작품 '소녀들(1911)'과 닮아있다. 둘이 바닷물 위로 나란히 비춰지는 모습은, 진아와 혜미 뿐만 아니라 영화를 감상하는 여성 관객들과도 동일시한다.
결국, 여성 관객들은 <파란 대문>을 통해 분신을 확인한 셈이다.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영화다. 김기덕 감독의 작품색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는 영화인 동시에, 인간의 본성이 결코 죄의식이 아님을 확인시켜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