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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웅 에세이
<버티는 삶에 관하여>



허지웅의 에세이 <버티는 삶에 관하여>를 이제서야 접했다. 다른 사람들보다는 그의 존재를 뒤늦게 알게 됐지만, 나는 처음 그를 보자 반해버렸다. 나는 그를 <마녀사냥>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 당시 나와 함께 프로그램을 봤던 남자친구에게 "저 사람 누구야?"라고 물었고, 그는 허지웅에 대해 "기자였고, 영화평론도 하고 요즘은 방송도 하는 사람이야."라고 설명했다. 이에 나는 "아 정말? 난 방송인인 줄 알았네. 기자 치곤 잘생겼는데? 말 되게 솔직하게 한다. 내 스타일이야!"라고 답했다. 그렇게 나는 그를 처음 알게 됐다. 당시 <마녀사냥>이라는 프로그램이 한창 인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방송도 처음 접했었다. 그렇게 나는 그와의 (일방적인)첫만남을 가졌다.


그의 책들이 몇 권 있다는 것만 알았고, 실제로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 알고싶어질 땐, 그리고 그가 펴낸 책들이 있고 그 장르들이 다양할 땐 에세이부터 집어든다. 그 속에는 그 사람의 삶이 반영돼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에세이는 솔직해야만 한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대의명분을 위한 거짓글들은 경멸한다. '그런데, 그게 거짓인지 참인지를 어떻게 판단해?'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책을 읽다보면, 꾸밈이 있을 땐 책의 맥락이 하나로 좁혀지지 않는다'라고.


허지웅의 <버티는 삶에 관하여>는 그의 두 번째 에세이라고 한다. 책에는 그가 사랑하는 것들과 생활, 사상 등이 나열돼 있다. 읽으면서 느낀 건, 그가 행복한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자기 주장을 거리낌없이 펼쳐보이는 용기를 가졌으며, 그가 사랑하고 잘 할 수 있는 것들을 직업으로 삼고 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나는 그가 행복해보였다. 나 역시 영화감상과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기에, 간헐적으로 질투 서린 부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는 다소 불행했던 유년시절의 가족사와 15만 원짜리 고시원에서의 삶들도 서스럼 없이 드러냈다. 물론, 그는 그 삶들 속에서도 행복을 발견하는 (의외로)긍정적인 사람이었다. 특히,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쑥스럽게 고백하는 글들이 인상적이었다. 스스로를 냉소적인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그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표현하니, 왠지 더 로맨틱했다. 글에서도 그의 냉소와 비관, 그리고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려는 자세가 배어있다. 그의 문체는 가히 '기자다웠'고, 사용하는 단어들 또한 모서리가 명확한 것들('적확' '피폐'와 같은)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사회적 문제와 그것을 부추기는 정치와 언론들을 비판한다. 연예계 및 영화판에 대한 뒷얘기들을 써내려간 챕터에서는 작가의 '기자 정신'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버티는 삶에 관하여>에는, 작가의 삶 뿐만 아니라 영화, 사회, 정치에 대한 작가의 시선과 정보까지 담겨있다. 그래서, 에세이이지만 '유익'하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의 뒷이야기(별책부록 '어차피 악플 달릴 이야기'에 수록)들과 <더 헌트>와 <똥파리>들을 통해 사회적 모순을 비판한 글들이 좋았다. 이것들로 하여금 나는 내 삶을 성찰할 수 있었다.


그의 다른 책들도 읽어봐야겠다. 어쨌든 나는, <버티는 삶에 관하여>를 통해 허지웅이라는 사람이 더 좋아졌다.



[책 속에서]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된다는 건 자기 주변을 책임질 일이 늘어간다는 것이다.

당신도 알다시피 책임을 진다는 건 말처럼 그리 고상한 일이 아니다. 더럽고 치사한 일이다.

내 소신이 아니라 남의 소신을 지켜주어야 하는 일이다. - 34쪽


사실 냉소는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편리한 방법 가운데 하나다. 비관과 냉소는 대개의 경우 피폐한 자들의 가장 쉽고 편한 도피처다. 나는 냉소의 영향력 아래 있을 때가 제일 아늑하고 좋다. 글쓰는 자에게는 냉소적인 태도가 객관성을 담보해주기도 한다. 뜨겁고 충만할 때보다 냉소적일 때 했던 말과 글이 더 오랜 시간 유효하다. 그래서 나는 곧잘 타인의 진심을 무시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진정성을 주장하는 말들을 무시한다.

실제 모든 종류의 '진심'이란 아무 의미가 없는 호소다. 진심, 진정성은 주관의 영역에 있는 것이지 남에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진심을 몰라준다고 세상을 탓할 일도 아니다. 나의 진심은 너의 진심과 다르고 그것의 공존을 중재하기 위해 법과 제도가 존재한다. - 101쪽


아, 나는 최근 몇 년간 그렇게 절망적인 눈을 본 적이 없다. 아주머니의 눈은 병아리 같았다. 전염이 될까봐 눈을 내리깔았다. - 107쪽


집단행위란 거기 가담하는 개인을 익명으로 만들기 때문에 개별의 지분을 축소하는 착시효과를 낳기 마련이다. 스스로 폭력의 주체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1/N의 폭력이 무서운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 185쪽


문제는 실체적 진실을 규명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며, 또한 똑같은 사실에도 이해당사자의 입장에 따라 다양한 면과 결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나의 정의와 너의 정의는 결코 같을 수 없다. 나의 상식과 너의 상식 또한 같을 수 없다. 사실관계를 따지기 위한 분쟁은 소모가 아닌 필연이다. 이를 통제하기 위해 인류는 법체계를 만들어 매우 오랜 세월 동안 발전시키며 사적인 차원을 복수를 금지해왔다. - 285쪽


한번 실추된 누군가의 명예는 결코 완전하게 회복되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일들은 대개, 정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 288쪽


사람이 괴물 되는 건 순식간이다. 자기 자신과 주변의 모습을 정확히 바라보지 못하고선 스스로 괴물이 되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똥파리>는 그런 노력을 부추긴다. - 318쪽


우리는 한 사람의 인생을 단 두 세 마디로 규정하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삶은 크고 작은 모순들로 가득 차 있다.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평가받는 사람부터, 끝내 실패한 인생으로 낙인찍힌 사람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순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 3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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