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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데이지의 인생>

데이지의 상자를 통해 발견한 행복



데이지의 상자를 펼쳐보았다. 요시모토 바나나. 유명한 작가이지만, 나는 그녀의 책을 접하지 않았었다. 이유는 딱히 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책이 읽고싶어졌다. 기대 중인 영화 <바다의 뚜껑>의 원작이 바로 요시모토 바나나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도서관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 책은 없었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작가의 감수성을 느껴보고 싶었다. 우선 그녀의 책들이 있는 코너로 가서 마음에 드는 제목의 책을 골라잡았다. 그 책이 바로 <데이지의 인생>이다.


작가의 감수성을 느낌과 동시에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나의 친한 친구도 공동 독자로 끌어들였다. 그 친구는 동갑내기 대학교 과후배인데, 좀처럼 수업에서는 만나볼 수 없는, 그야말로 땡땡이족이었다. 학과 공부엔 별 취미가 없어보였던 친구인데, 이상하게 도서관에선 자주 마주쳤다. 그 친구와의 만남은 학과실에서보다 도서관에서 더 잦았다. 사실, 친구들은 내게 좀처럼 접근을 잘 못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친구는 내가 '그래도 선배'인데, 아주 천연덕스럽게 '진짜 친구'처럼 접근해왔다. 나는 그런 대우(?)에 익숙지 않았는데, 그래서인지 그녀가 좋았다. 나는 그녀가 누구 때문에 도서관을 찾는지 궁금했다. 나는 종종 타인의 작품관을 물을 때, 선호하는 작품보다는 작가나 감독을 묻는 습관이 있다. 친구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을 좋아한다'고 밝혔다. 당시 나는 요시모토 바나나가 그려내는 캐릭터들이 예쁘지 않다는 이유로 그녀의 책에 호감을 표하지 않았었다. 어쨌든 그 친구는 내게 '요시모토 바나나를 좋아하는 친구'로 인식되었고, 희한하게 그녀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다른 지방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은 우정을 나누고 있다. 나는 그녀와 함께 <데이지의 인생>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며 나는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너, <데이지의 인생>도 읽었어?" "아니, 그건 안 읽은 듯." "아, 진짜? 나 지금 읽는 중인데 좋네. 네 감수성도 느끼고 있어. 너 요시모토 바나나 좋아하잖아." 나는 얼마 전 그녀와의 만남에서 "너, 요시모토 바나나 팬이잖아!"라는 말과 함께 도서관에서의 추억을 나눈 바 있다. 그때 친구는 "대단하네! 소름 끼친다!"라며 나를 기분 좋게 만들어줬다. 그녀는 스무살 쯤 읽었던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들에 대한 느낌을 이렇게 표현했다. '읽고 있으면, 일상처럼 편안하고도 섬세한데, 허를 찌르는 부분들이 있어서 나를 깨워줬다. 평소에 못 느끼던 걸 성찰하게 만드는 게 요시모토 바나나 책의 묘미다.'라고.


나는 공감했다. <데이지의 인생> 역시, 데이지의 일상을 통해 삶과 죽음, 가족애와 우정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데이지의 인생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과 비슷한 운명의 친구 달리아가 죽을 때까지 끊임없는 정신적 교류를 해왔다.


'무슨 까닭으로 엇비슷한 운명을 지닌 아이 둘이 지구의 반대편으로 갈라진 것일까.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서도 꿈을 통해 교류를 이어 가려 했던 것일까. 약속하고 부탁한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알 수 없는 독특한 힘이 작용해서, 그런 우연을 만들어 낸 것이다.'


어릴적부터 친구였던 데이지와 달리아. 하지만 달리아가 엄마와 함께 브라질로 이민을 가면서 둘의 물리적 거리는 멀어진다. 스물 다섯의 어느 날 데이지는 섬뜩한 꿈을 꾼다. 어둡게 버려진 묘한 집. 아무도 없는 그 집에는 먼지와 곰팡이만 쌓여있을 뿐. 싸늘한 감촉이 느껴지는 그런 '악몽 같은' 꿈. 이 꿈을 그녀는 연거푸 꿨다. 그러면서 달리아의 죽음을 직감했다.


야키소바와 오코노미야키를 만드는 일을 하는 데이지는, 달리아에게도 아키소바를 자주 만들어줬다. 달리아는 이렇게 말했다. "나, 외국에 살면서 평생 야키소바 못 먹어도, 이 맛은 잊지 않을 거야. 야키소바란 말만 들어도 이 맛을 떠올릴 거야."


달리아와 데이지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들만의 추억을 안고 교감하며 살아왔다.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고, 타인들의 편견들이 있었지만 그들 사이에서는 그것들이 무력했다. 가장 아픈 상황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줬다. 부모의 부재를 느끼며 살아왔던 소녀들. 하지만 그들은 그 공허함을 서로의 정으로 채워나갔다. 그들은 가족도, 연인 이상의 혼연일체를 느꼈던 관계다.


데이지의 또다른 친구 다카하루의 말이 인상적이다.

"죽음이나 삶보다 그게 더 고귀하지 않을까. 살아 있다고 충분한 것도 아니고, 죽었다고 비참한 것도 아니잖아. 하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 평생 마음의 버팀목이 될 만한 추억을 만드는 것은 살아만 있다고 가능한 게 아니야."


추억을 만들어나간다는 것. 나만의 상자를 만들어나간다는 것. 그게 바로 '인생' 아닐까. 데이지는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한다. '나라는 상자에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전부가 꼭꼭 들어차 있다. 누구에게 보이지 않고 누구에게 말하지 않아도, 그리고 내가 죽어도 그 상자가 있었다는 사실만은 남으리라. 우주에 둥실 떠 있는 그 상자의 뚜껑에는 '데이지의 인생'이라 쓰여 있으리라.'


그녀의 상자를 엿보며, 나의 상자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나 곰곰 생각해봤다. 아직 빈 곳들이 많은데, 그걸 어떻게 채워나갈까, 하는 계획 같은 것도 세워봐야겠다. 데이지 덕분에 나는 '내 친구, 참 착하고 따듯한 아이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덕분에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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