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의 소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은, 중동 출신의 남편 라비와 스코틀랜드 출신의 아내 커스틴의 이야기다. 그들은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따라서 문화와 생활 양식이 다르다. 하지만 둘에게는 한쪽 부모가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일자리에서 처음 만난 그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사랑을 표현하고 그것이 이어져 결혼에 이른다. 드 보통의 다른 소설들에 비해 이 책에서는 연애에 할애된 지면이 짧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은 '낭만적 연애'보다 '그 후의 일상'에 집중한다. 연애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사랑과 인간관계 3부작('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우리는 사랑일까', '키스 앤 텔')에서 면밀하게 다뤄왔다. 결국 드 보통이 내린 사랑의 결론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라'는 정석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많은 작가들이 내놓는 결론과 다르지 않는 정석 지향적 사랑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드 보통의 소설은 흥미 요소가 다분하다. 이유는, 마치 나의 이야기를 들킨 것 같은 상세한 묘사들에 있다. 어쩌면 결론 만큼이나, 사랑의 '과졍' 역시 정석이란 게 있는 건 아닐까? 작가는, 나의 삶을 살아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나의 사랑 이야기를 속속들이 아는 것일까? 발칙하지만 그와의 연애를 상상해본다면 왠지 재미 없을 것도 갚다. 그는 너무 나를 잘 알고, 나 역시 그의 책들을 너무 많이 읽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크게 연애와 결혼 생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연애 편은 '사랑과 인간관계 3부작' 속 연애 초창기를 닮아있다. 첫만남의 짜릿함에서부터 사귀기 이전까지의 밀고당기는 과정, 궁금하지만 솔직히 질문할수도, 답하고 싶지만 완전히 솔직히 답변할 수도 없는 그런 과정. 제목에서 명백히 밝혀둔 '낭만적 연애'는, 상대에 대한 최대한의 예의 갖춤에서 비롯된다. 쉽게 말해, '지킬 건 지키자'는 식이다. 본능을 지나치게 드러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낭만적 연애가 아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흑심을 품어서도 그 흑심을 행동으로 옮겨서는 '절대 안 된다'. 그렇게 연애는 낭만성이라는 옷(날개)을 입고, 사랑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결혼으로 이어진다.
자 이제, '험난'한 결혼 생활로 접어든다. 부부가 된다 하더라도 낭만주의를 완전히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위기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부부 사이에 관해 터놓고 얘기하는 흐름이 아무리 유행한다 해도, 숙고하고 시험할 기회가 그렇게 많았음에도 성급히 추진해 안 맞는 사람과 결혼했다고 인정하는 건 아직도 적잖이 부끄러운 일이다.' - 80쪽
어떨 때는 진실이 거짓보다 부부 관계를 훨씬 더 왜곡시킬 수 있다. 라비가 브리시오 카페의 딸에게 섹스 판타지를 갖고 있었던 것과, 출장 시 외도를 한 사실은 진실이지만 결혼 생활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 사실 우리는 모두 다르고, 그래서 '정상적인 타인'을 만나기란 극히 드물다. '우리 눈에 정상으로 보일 수 있는 사람은 우리가 아직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 뿐이다. 사랑을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이다.' - 236쪽
하지만 라비는 외도를 경험함으로써 결혼 생활과 커스틴을 다르게 보게 된다. '젊었을 때 그는 결혼 생활을 감정(애정, 욕구, 열정, 갈망 등)에 대한 축성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못지않게 하나의 제도로서도 중요하게 인식한다.' - 242쪽
순간의 외도와 일탈은 사랑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가슴과 육체의 경험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것들이 동일하다면 라비와 커스틴의 이야기는 파국으로 치닫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외적 상황이 가끔은 자신의 가슴이 경험하는 것과는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줄 안다. 아마도 그가 바른 궤도에 들어섰다는 신호이리라.' - 244쪽
라비와 커스틴은 처음에 사랑했던 상대와 너무 달라진 상대에 대해 불만과 불안을 느낀다. 그들은 서로를 몹시 필요로 하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워한다. 그들은 결국 심리상담을 받기로 결정한다. 라비와 커스틴은 사실은 '너무 다른' 모습을 지닌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라비 불안과 공격성을, 커스틴은 회피와 퇴각을 드러낸다. 그러면서 서로의 다름을 이해해나간다.
결국,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은, 사랑이 단순한 열정이 아닌 기술에 의한 것임을 일깨워준다. 부부 생활을 '일상'이라 표현한 이유는, 일상적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기술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아닐까.
라비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결혼 생활이 십 여 년 지난 후에야 비로소 '결혼할 준비가 됐다'고 판단한다. 결혼할 준비가 됐다는 것은, 상대가 서로 잘 맞지 않는다고 가슴 깊이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영구적인 조화는 불가능하며, 따라서 완벽해질 수 없다. 결혼은 하나의 제도이며, 결혼 후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라비와 커스틴의 일상을 훔쳐보는 과정에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평범한 인생을 사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우리 개인이 완벽하지 않듯, 타인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세. 불완전한 개인이 만나 일상을 영위해간다는 것 역시 불완전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관계를 이어가기 위한 노력(기술)과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 수많은 사랑 이야기를 논하는 사람들이 그랬듯, '사랑은 기술'이다. 그 기술의 기본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마음가짐에 있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은 경험에 의한 성숙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