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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영화 <커피메이트>

속마음을 숨김 없이 펼쳐내보일 수 있는 상대. 과연 몇이나 있을까? 가족, 연인, 가장 친한 친구. 이들에게도 분명 말 못할 비밀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비밀은 걱정과 고통의 씨앗인 경우가 많다. 어쩌면 우리는, 타인을 배려하려는 차원에서 비밀을 쉬이 털어놓지 못할 때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걱정의 다른 이름인 비밀이 많을 땐 혼자가 되는 때가 많다. 그러면 어느 정도 마음이 차분해지고 정리되는 것 같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답함을 표출할 도리는 없다. 혼자의 시간은 정리에는 도움이 되지만, 응어리를 풀어주거나 답답함의 출구 역할은 하지 못한다.


어떤 영화에서 이런 맥락의 대사가 있었다. '전혀 모르는 상대에게 오히려 솔직할 수 있다, 그러니 털어놔라'는 식의 대사. 멋있었다. 와닿았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보다 조금 어릴 땐 이해하지 못했었다. 어떻게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사생활보다 더 은밀한 내면을 펼쳐내보일 수 있겠냐는 게 당시의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되니, 이보다 더 공감 가는 말을 찾을 수 있을까, 라고 느낄 정도다.



나에게도 가족과 친구도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나의 비밀이나 걱정 따위를 솔직하게 털어놓은 적은 그리 많지 않다. 나는 거짓말쟁이도, 비밀 많은 신비주의자도 아니다. 하지만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될' 감정 따위를 끌어올리지는 않는 유형이다. '괜히' 긁어부스럼이 될까봐, 사랑하는 이들에게 짐이 될까봐,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닌 찰나의 감정일 수 있으니 표현을 유보시키는 게 낫겠다, 싶어 솔직하지 못했었다.


<커피메이트> 속 두 인물, 인영과 희수 역시 나와 닮은 인물들이다. 아마 나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의 일면은 저들과 닮았을 것이다. 그들은 매일 같은 커피숍, 같은 자리에 앉아 혼자만의 시간을 즐긴다. 그러던 중, 희수가 용기를 내 인영에게 다가간다. 그렇게 둘은 커피메이트가 된다. 그들은 나름의 규칙을 정한다. 커피숍 내에서만 만날 것. 밖에서는 마주쳐도 알은체 말 것 등. 둘은 반말로 관계를 좁히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비밀을 고백하며 가까워진다. 그러다 정이 쌓이고, 커피메이트 이상의 감정에까지 이른다. 하지만 이들은 현실의 벽 앞에 멈춰서고 만다.


이 영화는 쓰디쓰다. 이들이 즐기는 블랙 커피 처럼, 새카맣고 씁쓸하다. 주 무대는 커피숍이라는 한정된 장소이며, 그들의 사연 역시 쓰디쓴 기억들이다. 대화를 이어가고 게임을 진행하는 과정에서도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다. 이들은 서로의 비밀을 털어놓는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된 동시에 또 하나의 비밀을 간직하게 된, 아이러니컬한 관계가 되어버린 셈이다.


인영과 희수는, 저마다의 답답한 심경을 풀어내기 위한 방법을 마련한다. 게임의 벌칙을 통해 커피숍을 벗어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유로움을 표출하는가 하면, 인영은 자신의 살에 구멍을 낸다. 이같이 <커피메이트>에는, 익숙하지만 상징적인 신(scene)들이 자주 등장한다.


일면식조차 없었던 두 남녀가 만나, 서로의 비밀을 털어놓으며 가까워진 사연. 하지만 이들 역시 완전히 솔직하지는 못했다. 아무리 솔직하려 애써도, 결국 완벽히 솔직해질 수 없는 것이 인간인가 보다.


솔직히, 영화가 택한 소재나 연출은 익숙하다 못해 진부하다. 그럼에도 여운이 컸다. 이유는, 이 영화가 걱정과 비밀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색다른 방법론과 위로를 선사했기 때문이다. 치명적인 행동이 아니라면, 표현하는 편이 좋을 성싶다. 문제는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몇몇 사람들이 떠오른다. 가족, 그리고 친구들. 사랑한다, 좋아한다면서 정작 그들에게 속 깊은 이야기를 꺼낸 적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아 후회된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조금씩 표현을 해나가야겠다고 다짐하는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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